한양도성 역사 탐방 - 국보1호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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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역사 탐방 - 국보1호 숭례문

by yeonjaei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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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역사 탐방 - 국보1호 숭례문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어제는 한양도성 역사탐방의 일환으로 숭례문을 둘러보았는데, 국보1호 숭례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숭례문

 

 

조선왕조를 세운 지 3년째인 1394(태조 3)에 한양이 새 도읍으로 정해지고 여기에 새 도성이 건설되었다. 도성 건설 계획에 따라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고 곧이어 경복궁을 건립하였으며, 수도 전체를 방해할 목적으로 도성 둘레 네 산에 성곽을 쌓았다.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을 두어 도성내외로 출입하기 편리하게 하였고, 정문인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이름 지었다.

 

 

숭례문은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과 함께 우리나라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성문이다. 1396(태조 5)에 시작하여 1398(태조 7)에 완성되었는데, 1448(세종 30), 1479(성종 10), 1868(고정 5) 등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를 통해 잘 보존되어, 196212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08210일의 방화로 문루 2층이 불에 타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정밀 피해조사 2, 복구공사 3년 등 모두 5년에 걸친 작업끝에 원형에 가깝게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의 숭례문

 

 

숭례문은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쓰인 성문인 동시에,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나라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또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시킬 때 관료들이 숭례문 밖에서 전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조(1724~1776)가 숭례문 문루에서 죄인을 다스렸다거나, 정조(1776~1800)가 수원 현륭원에 행차할 때 숭례문 안팎에 척후와 복병을 배치 하였다거나, 순조(1800~1833)가 능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신주를 숭례문 밖에서 맞이했다거나 하는 기록 등을 통해 숭례문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과 주변에 군사를 배치하여 도성 내부의 왕궁과 백성을 파수한 것은 물론 통금 시간(2~5)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성문 여닫는 신호는 종이나 북을 쳐서 알렸는데, 2경에 성문을 닫는 제도를 '인정', 5경에 성문을 여는 제도를 '파루'라 하였다. 숭례문에 종을 달았다는 기록은 1425(세종 7) 4월에 처음 보이고, 이후 종을 쳐서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는 기록이 1536(중종 31), 1594(선조 27), 1598(선조 31) 세 차례 보인다.

 

일상적으로 성문을 여닫는 일 이외에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내야할 경우에는 불의 방위인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물의 방위인 북쪽의 숙정문(숙청문)은 열어 시장을 옮기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등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비가 내리면 다시 숭례문을 열고 옮긴 시장을 원래 자리로 들어가게 하고 다시 북을 치도록 하는 등 원래 상태대로 되돌렸는데, 1528(중종 23) 가을 가뭄에는 봄 여름과 달리 기우제만을 지냈다.

 

숭례문의 건축

 

 

숭례문은 화강암을 높이 쌓아 만든 홍예문(무지개 모양 문)을 출입구로 삼아 도성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으며, 그 위쪽에 2층 목조 건물(문루)을 세웠다.

 

2층 문루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동서 양측에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문루 둘레에 전통 벽돌 담장을 두르고 돌계단과 만나는 곳에 작은 문을 내어 문루 출입구로 삼았다. 문루 하층 내부 바닥 가운데 1칸은 마루를 깔고 나머지는 모두 흙바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층마다 모두 겹쳐마로 만들어졌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라 불리는 장식용 기와를 각각 세워 지붕에 위엄을 더하였다.

 

근대의 숭례문

 

 

1899년 숭례문의 홍예 아래로 전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도성 안팎의 출입을 통제하던 고유의 기능을 비롯하여 군사적, 의례적, 사상적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의 4대문은 도로의 확장에 따른 성곽의 철거, 도시의 확장에 따른 도성의 해체 과정 등을 겪으면서 축대와 문으로만 이루어진 성문으로 남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에는 숭례문 주변에 원형 석축이 만들어지고 그 주위로 전철과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숭례문은 물산공진회나 박람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1930년대 후반부터는 홍예 내부로의 출입과 접근마저 금지되어 숭례문은 주변 도로로 둘러싸여진 섬처럼 고립되게 되었다.

 

현대의 숭례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숭례문 석축과 문루가 총탄과 포탄 등에 의해 훼손되어 1953년에 긴급하게 수리하였으며, 1961~1963년에 다시 석축 일부와 문루 전체를 수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훼손된 부분이 거의 복구되었다. 서울시가 숭례문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 뒤 20063월에 숭례문을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창건 후 600여 년 동안 수많은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건재했던 숭례문은 2008210일 발생한 방화로 목조건물인 문루 일부분이 불에 탔다. 잔해를 조사한 결과 문루 2층의 90%110%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기존에 작성된 정밀 실측 도면과 사진을 활용하면 문루를 복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그 후 2008년부터 2000년까지 약 2년간 정밀 실측 조사와 구조 안전성 검토를 마쳤으며, 20102월 복구 공사에 착공하여 201354일 공사를 완료한 다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복구 이후의 숭례문

 

피해 복구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을 복구공사에 반영하여 그동안의 수리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았다. 1층 지붕 추녀마루의 잡상을 8개에서 7개로 바로 잡고, 용마루 길이를 15.7m에서 16.6m로 고쳤는가 하면, 동쪽 계단 폭을 2.9m에서 5m로 늘리고, 문루 1층 중앙칸에 설치된 마루를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고쳤다. 또한 1907 ~1909년 사이에 헐려나간 성문 좌우 성곽을 동쪽 53m, 서쪽 16m까지 복원하였다.

 

1900년대 초 서울 전경

 

숭례문 남서쪽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남지 혹은 연지라고 불렸다. 조선초 한양도성을 지을 때 풍수상 화기를 막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차례 매몰되고 회복되기를 반복하였다가 1907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매립되었다.

 

1900년대 숭례문

 

숭례문을 통과하여 전차가 지나가는 모습(1904년경)

 

일제강점기 숭례문(1930년대)

 

숭례문 양쪽의 성곽이 헐리고 주변에 전신주와 가로등이 세워진 모습.

 

1950 ~1960년대 숭례문 

 

1951, 6.25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숭례문

1963, 중수된 숭례문

 

1970년대 ~ 현재 숭례문

 

 

1979, 도로에 둘러싸인 숭례문(왼쪽)과 현재의 숭례문(오른쪽)

 

숭례문 이름에 담긴 뜻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문 이름은 유교의 덕목인 인, , , 지를 따서 지었다. 숭례문은 이 가운데 '예를 숭상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를 쓴 인물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 숭례문 화재로 현판이 일부 손상되어 양녕대군의 위폐를 모신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 탁본과 근대 시기에 촬영된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숭례문 복구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복구 공사는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문화재의 가치 유지와 일제강점기 훼손된 성곽의 원형 복원을 원칙으로 삼았다. 숭례문 육축의 석재는 화재로 인한 안전성 여부의 평가를 거쳐 대부분 재사용하였고, 일부 석재만 새로 교체되었다.

 

목재로 된 중층 문루는 화재로 인해 상층부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으나, 하층부는 다행히 크게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안전성이 확인된 기존의 부재 약 34%를 재사용하였고, 나머지는 국민이 기증한 목재와 새로 구입한 목재를 이용하여 복구하였다.

 

장군목

 

대궐, 성문 등의 큰 문을 닫고 잠글 때 빗장처럼 가로지르는 굵고 긴 나무

 

조선통신사의 길

 

숭례문 앞 왼쪽 길가에는 조선통신사의 길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1607년 조선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출발했던 길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 400주년을 기리고 선린 우호 정신을 다짐하며 여기 이정표를 세웁니다.

20074

사단법인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

 

남지 터

 

숭례문 앞 오른쪽 길가 모퉁이에는 남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서울 도성 숭례문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에서 관리하였음

* 출처 : 숭례문 팜플렛(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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