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탐방③ * 목멱산 봉수대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백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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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탐방③ * 목멱산 봉수대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백범 광장

by yeonjaei 2020.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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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탐방* 목멱산 봉수대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백범 광장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얼마 전 서울 남산을 역사탐방 했는데, 오늘은 남산 탐방 마지막 포스팅으로 목멱산 봉수대와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 광장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목멱산 봉수대

 

 

목멱산 봉수대는 남산 정상 광장에서 팔각정과 국사당 터 뒤쪽에 있습니다. 목멱산 봉수대는 서울에 있다 하여 경봉수라고도 불렀었는데, 조선 시대의 중앙봉수대인 남산의 봉수대가 있던 곳입니다. 전국 팔도에서 올리는 봉수의 종착점이었습니다. , 조선시대에 전국 각지의 경보를 병조에 취합해 보고하는 중앙봉수소의 역할을 수행한 경봉수였습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나타나고 있어 오래전부터 봉화를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1394(태조 3)에 처음 설치되어 갑오개혁으로 봉화가 폐지된 1895(고종 32)까지 약 500년간 운영되었습니다. 1930년대까지 남산에 5개의 봉수대 터가 산 정상에 일렬로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므로 그 후에 훼손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5개소가 있었는데, 동쪽 제1봉은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으로, 2봉은 경상도·충청도 방면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3봉과 제4봉은 평안도 및 황해도 방면의 육로와 해로를 각각 통하게 하고, 5봉은 전라도와 충청도 방면의 해로와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서울특별시는 1993년 김정호의 <청구도> 등을 참고하여 현 위치에 목멱산 봉수대 1개소를 추정 복원하고,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마주치는 남산도서관 뒤편에 있습니다. 1970년에 개관한 구 기념관이 낡아 20101026일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0910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안중근(1879~1910)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입니다.

안의사 기념관이 자리는 원래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공사관이 있었던 남산 일대와 명동, 예장동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으며 조선신궁은 그들의 기도처였습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철거되었고, 1970년 그 자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워 민족정기를 다시 세운 것입니다.

2010년 새로 건립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안의사의 단지동맹을 상징하는 12기둥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의 출생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획전시실에는 옥중유묵이 전시되어 있고, 체험전시실에서는 안중근 의사에게 편지쓰기, 단지혈서 엽서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거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의사 정원에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말들을 바위에 새겨 전시하고 있습니다.

 

백범 광장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숭례문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백범 광장이 나옵니다. 백범 광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조성된 광장입니다. 이듬해인 1969년에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조선말부터 광복 이후 암살되기까지 개인의 사심을 버리고 오직 국가와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몸소 희생한 분입니다. 임시정부가 해체되려고 할 때마다 그의 노력으로 유지되었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습니다.

 

김구 선생 동상 왼쪽에는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한성재판소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형제 모두와 상의 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많은 독립군을 배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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