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세계문화유산답사 - 조선왕릉 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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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세계문화유산답사 - 조선왕릉 서오릉

by yeonjaei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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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세계문화유산답사 - 조선왕릉 서오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얼마 전 세계문화유산답사의 일환으로, 경기도 고양에 있는 조선왕릉 서오릉을 둘러보았는데, 오늘은 서오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오릉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에 위치하며,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오릉에서 오릉은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을 일컫는다. 1457년 세자를 경릉에 안장한 이래 1470년 창릉에 예종과 안순왕후, 1681년 익릉에 인경왕후, 1721년 명릉에 숙종과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1757년 홍릉에 정성왕후를 안장함으로써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서오릉에는 오릉 이외에도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고, 영조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수경원이 있으며,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대빈묘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능의 총면적은 553,616평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족분을 이루고 있다. 위치상 서울 시내와 다름없을 만큼 가까워서 산책이나 조깅 코스로 좋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써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6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명릉(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의 능)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명릉의 석물은 숙종의 명에 따라 크기를 줄이고 간소하게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8각 장명등이 4각 장명등으로 바뀌었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이다. 제사에 관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현재 서오릉에는 명릉 재실의 일부만 남아 있다.

 

수경원(추존 장조 생모 영빈의 능)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 사친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할머니이다.

 

1764(영조 40)에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788(정조 12)에 선희묘로 고쳤고,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영빈 이씨는 황제의 사친으로 추존되어 원호를 수경원이라 하였다. 이후 1970년에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익릉(숙종비 인경왕후의 능)

 

 

익릉은 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이다.1680(숙종 6)에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81(숙종 7)에 현재의 자리에 익능을 조성하였다.

 

인경왕후는 11세에 세자빈이 되었다가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숙종사이에 공주 둘을 두었으나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익릉의 정자각 양옆에 익랑이 붙어 있으며, ·어로는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순창원(순회세자와 공회빈의 능)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원소는 추존 덕종의 경릉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과 표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를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세상을 떠났다. 1563(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공희빈은 1592년 세상을 떠났는데,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시신이 수습되지 못하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희빈의 신주를 만들어 순회세자와 합장하였다.

   

경릉(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1455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전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왕, 오른쪽 언덕(동쪽)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동쪽)에 덕종을 모셨고 왼쪽 언덕(서쪽)에 소혜왕후를 모셨다.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에 맞게 능을 조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빈묘(경종 생모 옥산부대빈의 묘) 

 

 

대빈묘는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묘이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희빈은 1701(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혐의(무고의 옥)가 밝혀져 자진하였다.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1722(경종 2)에 왕의 생모로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홍릉(영조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 한 분만 모신 단릉의 형식이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도 쌍릉의 형식을 생각하여 글을 새겼다.

 

현재까지 홍릉의 능침 자리가 비어 있다. 1757(영조 33)에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예종의 창릉 동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숙종의 명릉제도를 참작하여 쌍릉 형식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허우제로 홍릉을 조성하였다.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비워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의 동구릉 내의 원릉에 영조를 모시면서 현재까지도 비어있게 되었다.

 

창릉(예종과 안순왕후의 능)

 

 

창릉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예종, 오른쪽 언덕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1469(예종 1)에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70(성종 1)에 의경세자의 의묘 북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498(연산군 4)안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9(연산군 5)에 창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그러나 재위 1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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