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 학생대표 3·1운동 모의한 곳 승동교회와 이율곡 선생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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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 학생대표 3·1운동 모의한 곳 승동교회와 이율곡 선생 살던 곳

by yeonjaei 2020.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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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 학생대표 3·1운동 모의한 곳 승동교회와 이율곡 선생 살던 곳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동안 서울 종로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인사동 일대를 탐방하고 그 결과를 몇 번에 걸쳐 포스팅했습니다.

 

오늘은 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마지막 포스팅으로, 학생대표들이 모여 3·1운동을 사전에 모의했던 종로 인사동 승동교회와 승동교회 안에 있는 이율곡 선생 살던 곳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학생대표 3·1운동 모의한 곳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북인사마당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승동교회 간판이 골목길 입구에 있습니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제법 오래되고 큰 교회가 보이는데, 바로 승동교회입니다.

 

 

 

교회 입구 앞에는 ‘3·1독립운동 기념 터(승동교회)’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인 김원벽과 담임목사인 차상진의 활동을 소개하는 승동교회와 3·1운동에 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3·1독립운동 기념 터(승동교회)에는 “3·1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 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승동교회와 3·1운동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을 비롯해서 학생 지도자들은 1919220일에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3·1학생독립 만세운동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독립만세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서 이곳에서 23일 학생측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83·1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당시 차상진 담임목사는 "12인 등의 장서"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고 투옥당하였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참고로 연희 전문 김원벽은 35일 보성전문 강기덕, 경성의전 한위건 등과 함께 서울역 앞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역 부근 역전우체국 바로 못미처에는 ‘3·1독립운동 기념 터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이 표지석에는 “19193·1운동 당시 시민 학생 수천 명이 모여 제2차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던 곳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차상진 목사(1875)191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승동교회 5대 목사로 취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14일 안동교회 김백원, 평북 정주교회 조형균, 평북 의주교회 문일평 등 12명과 함께 식민지 지배를 규탄하는 12인의 장서를 작성해 조선총독부에 전달했습니다. 김백원은 보신각 앞에서 장서를 낭독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차상진은 김원백 등 242명과 함께 재판을 받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는다. 독립운동가 여운형도 이 승동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승동교회 교회당

 

 

이 건물은 1893년 미국 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19193.1운동 당시 전국의 학생 대표들이 이 교회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 선언문을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승동교회는 한국 교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행사가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수리와 증축이 거듭되면서 건물의 외벽에 구조적 결함이 생겨, 외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골로 보강하여 안전하게 복원하였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율곡 선생 살던 곳

 

 

승동교회 교회당 앞 화단 한쪽에 이율곡 선생 살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표지석에는 이 언저리는 이이 율곡(1536 ~1584) 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표지석은 처음에는 종로구 관훈동 197 백상빌딩 앞 화단에 있었는데, 얼마 전 이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대충 갖다 놓은 듯한 사람들이 찾기도 어려운 곳에 처량하게 세워져 있는 표지석이 왠지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이율곡 선생은 1536(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강릉의 명소로 꼽히는 오죽헌의 몽룡실이 바로 그곳이라 한다. 오죽헌은 모친인 신사임당이 거주하던 집이었다.

 

 

이이 선생은 임진왜란 이전 국방력 강화를 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던 선각자였습니다. 또한 어려서는 신동으로, 성장한 뒤에는 모두 9번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며 그 우수함과 뛰어남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또한 주기설을 주창하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유학자로서, 근엄하고 단아한 풍모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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