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 삼일독립선언 유적지와 3.1독립선언 광장, 순화궁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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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 삼일독립선언 유적지와 3.1독립선언 광장, 순화궁 터

by yeonjaei 202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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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문화유산 투어 삼일독립선언 유적지와 3.1독립선언 광장, 순화궁 터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요즈음 서울 종로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인사동 일대를 탐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사동 탐방 중에 둘러본 3·1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태화관로 태화빌딩 옆과 앞에 있는 삼일독립선언 유적지와 3.1독립선언 광장, 그리고 순화궁 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서울 종로 우정국로를 따라가다가 태화관로로 들어서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인사동 태화빌딩(서울 종로구 인사동 197-27)이 보입니다. 이 태화빌딩 오른쪽으로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에 있던 태화관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31일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입니다.

 

 

아래는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에 새겨진 글을 옮긴 것입니다.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타라 불행하게도 을사·경술 두 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 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 대표 일동은 여기에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 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에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에 사로잡혔다. 그 뒤 남 감리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 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 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왼쪽 철판에 새겨진 3·1독립선언서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 오른쪽으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가 있습니다. 기념비에는 ",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도다."라고 적혀 있네요. (20191223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 종교인 연합)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왼쪽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 기념비를 세우게 된 배경 등이 적혀 있는데, 이를 소개합니다. 

191931일 이곳에 있던 옛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지도자 33인이 민족 대표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 3.1운동이 시작 되었다. 이들 세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 대동단결하여 손을 잡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계 인사들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정신을 후세에 전할 기념비를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이 자리에 세우기로 뜻을 모으고 2019531일 종교인 연합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건립 추진 위원회(공동대표 : 박남수 이만열 덕조)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3·1운동 직후 이완용 소유였던 옛 태화관을 구입하여 태화여자관을 설립한 후 100년 동안 사회복지사업을 펼쳐온 감리회 태화 복지재단(대표이사 : 전명구)이 제공한 터에 민족의 화합과 평화통일, 그리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기념비를 세운다.

 

20191223

종교인 연합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건립추진 위원회

사회복지법인 감리회태화복지재단

 

 

 

이 사진은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장면입니다.

 

 

이 사진은 3·1운동 때 중화읍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른 후 태화여자관 여자야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이효덕이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장소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3·1독립선언 광장

 

 

태화빌딩 앞에는 2019년에 조성된 3·1독립선언 광장이 있습니다. 3·1독립선언광장은 19193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태화관 터(명월관 인사동 지점)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가 조성하였습니다.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온 돌과 우리 겨레의 비와 땀이 서린 나라 안팎 여러 곳에서 모인 돌들이 주추가 되었습니다. 천지와 백록담을 비롯한 전국 하천에서 가져온 물은 이 광장에서 섞여 우리 국토의 동맥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물길은 우리 산천 곳곳에서 모아온 물이 백두에서 한라로 흐르는 형상입니다.

 

소나무 세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는 3.1 운동을, 바닥 조명은 역사의 등불이 된 독립운동가들을 뜻합니다. 독립선언서 돌기둥에는 돌기둥 몸에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을 국한문. 한글. 영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광장에 심은 풀꽃 대부분은 한국 고유종입니다. 이 광장에서 뜻이 스미지 않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광장 이름은 널리 뜻을 구하여 시민 공모로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겨레는 3·1운동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3·1독립선언 광장은 독립의 고향입니다.

3·1독립선언 광장은 선언의 고향입니다.

3·1독립선언 광장은 만세의 고향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역사는 새로 굽이쳐갔습니다.

 

순화궁 터

 

태화빌딩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순화궁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표지석에는 조선조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김재청의 딸) 사당인 순화궁이 있었던 자리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경빈 김씨는 1847(헌종 13)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후사가 없자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궁호를 순화라 하였습니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매우 사랑하여 창덕궁 내에 낙선재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했으며, 같은 창덕궁 내에 석복헌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도 하였습니다.

 

1849(헌종 15)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순원왕후, 신정왕후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으며, 효정왕후에게 예를 다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1907년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고종은 깊이 애도하고 조문을 직접 지어 내렸다고 합니다. 현재 묘소는 서삼릉 내 귀인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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