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길 5코스 숭례문 구간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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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5코스 숭례문 구간 탐방

by yeonjaei 2020.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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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5코스 숭례문 구간 탐방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지난 일요일 한양도성 순성길 5코스인 숭례문 구간을 탐방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양도성 순성길 숭례문 구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1396)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특히 동서남북 4대문에는 유교의 4가지 덕목인 , , , 를 담았다.

 

한양도성 순성길

 

한양도성 순성길은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뉜다. 백악 구간은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숙정문, 말바위 안내소, 와룡공원을 지나서 혜화문까지 이르는 구간이고(난이도 ), 낙산 구간은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 동대문성곽공원을 지나서 흥인지문까지 이르는 구간(난이도 )이다. 그리고 흥인지문 구간은 흥인지문에서 시작하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광희문을 지나서 장충체육관까지 이르는 구간(난이도 )이다.

 

남산(목멱산) 구간은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여 장충체육관 뒷길, 나무계단길, N서울타워를 지나서 백범광장까지 이르는 구간(난이도 )이고, 숭례문 구간은 백범광장에서 시작하여 숭례문, 소의문 터, 정동을 지나서 돈의문 터까지 이르는 구간(난이도 )이며, 인왕산 구간은 돈의문 터에서 시작하여 월암공원, 인왕산 순성길을 지나서 창의문까지 이르는 구간(난이도 )이다.

 

숭례문 구간

 

숭례문 구간은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숭례문 구간의 거리는 1.8km, 소요 시간은 약 1시간이며, 주요 구간은 백범광장 - 숭례문 - 남지 터 - 대한·서울상공회의소 - 소의문 터 - 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 - 구러시아대사관 - 창덕여중 - 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이며, 난이도는 하()이다.

 

숭례문 구간 주요 지점 탐방

 

 

남산 백범광장에서 돈의문 터 방향으로 출발함. 백범광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조성된 광장이다. 이듬해인 1969년에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김구 선생 동상 왼쪽에는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다.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한성재판소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형제 모두와 상의 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많은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한양도성 내부 순성길을 따라 내려감. 순성길을 따라 숭례문으로 이동

   

순성길 왼쪽으로 보이는 서울로 7017. 서울로 7017는 고가도로를 개조하여 만든 보행 공원이다. 서울로7017이라는 이름은 ‘1970년에 만들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에 다시 태어나고, 1970년대 차량길에서 17개의 사람길로 재탄생하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17m 높이의 고가'라는 의미를 모두 담은 이름이다.서울로 7017에는 관광안내소 및 카페부터 목련무대, 달팽이극장, 장미무대, 방방놀이터 등 다양한 체험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쉬고 거닐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자, 645개의 원형 화분에 총 228종의 24,085주의 다양한 수목을 식재한 아름다운 공중정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숭례문이다.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2월 화재로 목조인 1층 약 10%, 2층 문루 약 90% 소실되었다가 20135월 복구되었다. 이때 숭례문 서쪽 16m, 동쪽 53m의 성벽을 연결하였다.

 

남대문시장이다. 남대문시장은 1897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상평창이 있었는데, 17세기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 창고로 바뀌었다. 1894년 조세금납화 조치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주어 시장으로 삼았다.

 

숭례문 앞에서 길을 건너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방향으로 가는 길모퉁이에 남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서울 도성 숭례문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에서 관리하였음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 성벽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 있다. 1907년 한양도성의 본격적인 철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했다. 여장은 물론 체성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훼손되었는데, 최근 옛 성돌의 흔적 위에 새로 몇 단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소의문(서소문) 터 방향으로 이동.

 

소의문(서소문)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던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이었다. 영조 20(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소의문은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나갈 때에도 사용되었다.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 시대 사형 집행장이었다.

 

서소문역사공원도 잠시 둘러봄. 서소문역사공원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원래는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지'로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와 구한말 서소문 전투의 군인들 등 사회개혁 세력들뿐만 아니라,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서소문은 아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 시장으로 통하던 문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다. 조선 시대의 사형집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서 행해졌으며, 서소문 밖도 이러한 이유에서 1416(태종 16)에 서울의 주요한 형장으로 지정되었다.

 

다시 고가를 지나 순성길을 따라 순화빌딩에서 왼쪽 길로 들어섬.

 

이곳 일대는 수렛골이라 불리던 곳. 이곳 순화동 5번지 일대는 원래 조선조 숙종대왕비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다. 이 지역을 수렛골 또는 차동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 마을에 숙박 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아펜젤러 기념공원.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에 따라 188542일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있으면서 학교와 병원 등에 복음전도의 여러 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 1029일 서울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을 설립했다. 1890년 한국성교서회를 창설하여 1892년 회장직을 맡는 등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선교사업 외에 민족계몽운동에도 조력했다.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익사했다  

 

아펜젤러 기념공원과 배재빌딩 뒤편에 있는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8월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 처음에는 주변의 민가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고종은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 건물(동관)1916년 준공하여 배재 중고등학교가 1984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현재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다시 러시아공사관, 배재어린이공원을 거쳐 정동제일교회 방향으로 이동

 

정동제일교회. 이 교회는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1895년에 착공, 1897년에 완공하였다. 인근의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더불어 개화기 미국 문물 도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배재학당의 교장이었던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특히, 19세기 전원풍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 건물은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모델이 되었으며, 1977년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3.1운동 당시에는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일제강점기 항일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열렸으며, 1920년 이화여고생이었던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동극장. 정동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1995년에 건립되었다.

개관 이래 현재까지 수준 높은 공연·예술을 기획 개발해 선보이고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보급하고 있는 복합 공연장으로, 한국 전통 공연예술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며 문화관광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정동극장 옆 덕수궁 중명전도 잠시 둘러봄(휴관 중). 이곳은 대한제국의 희망과 고통이 혼재했던 비운의 역사가 흐르던 장소이다. 1901년에 지어진 중명전은 지금의 덕수궁에 포함된 건물로서 접견소 및 연회장, 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또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1905년 을사늑약을 맺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것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1907년 헤이크에 특사를 파견하기 위해 준비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고종의 치열한 노력이 남겨져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중명전은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1907년 강제 퇴위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등록문화재 제3>.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이 창설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887년 명성황후가 지어준 것이다.

 

구러시아공사관 자리도 둘러봄. 구러시아공사관은고종 27(1890)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동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사적 제253>.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18962월 이곳으로 피신해 1년간 머물렀다(아관파천). 지금은 복원 공사 중~~

 

창덕여자중학교 내에 있는 한양도성 흔적. 돈의문과 주변 성곽은 일제강점기 시구개수사업(1915) 과정에서 훼손되었는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에 일부가 남아 있다. 담장 아랫부분에는 19세기 초 순조 때 쌓은 성벽이 50m 정도 이어져 있다.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자리. 창덕여자중학교 이곳은 개화기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자리로 1896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건물의 머릿돌이 남아있다.

 

돈의문 터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한양도성 순성길 5코스 숭례문 구간 탐방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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