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문화유산 투어 - 삼일대로 조광조 선생 집터와 지석영 선생 집터,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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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문화유산 투어 - 삼일대로 조광조 선생 집터와 지석영 선생 집터, 운현궁

by yeonjaei 2020.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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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문화유산 투어 - 삼일대로 조광조 선생 집터와 지석영 선생 집터, 운현궁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는 종로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종로2가에서 출발하여 삼일대로 일대를 탐방하였습니다. 삼일대로 탐방 중에 만난 조광조 선생 살던 집터와 지석영 선생 집터, 그리고 운현궁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광조 선생 살던 집터

 

조광조 선생 살던 집터는 낙원상가에서 삼일대로를 따라 운현궁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서울 교동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교동 초등학교 앞 삼일대로 가운데에 화단이 있는데, 화단 맨 앞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표지석에는 "정암 조광조(1482 ~1519) 선생이 살던 한양 골 집터(돈의동)"라고 적혀 있습니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 도학 정치를 주창해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훈구파를 억제하기 위해 현량과 실시, 위훈 삭제 등 급진적 개혁 정치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습니다.

 

지석영 선생 집터

 

 

조광조 선생 살던 집터에서 운현궁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길가에 '지석영 집터' 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표지석에는 "종두법 보급과 서양 의학 도입, 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지석영(1855~1935)의 집 터 "라고 적혀 있습니다.

 

지석영 선생은 조선 후기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을 전파한 조선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입니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고, 자라서는 개화사상가 강위에게서 서양의술과 신지식을 배웠으며, 특히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전파했습니다.

 

선생은 후에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글과 한국어에도 관심을 가져 초기 국문연구의 초석을 닦았고 우리말 문법 체계를 수립하는데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서울대병원에 있는 대한의원 앞에는 지석영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송촌 지석영 선생은 조선왕조 말에 처음으로 종두법을 도입, 보급한 근대 의학의 개척자로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근대의학 교육기관인 관립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이땅에 의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서, 이제 우리 후학들은 선생의 높은 업적을 기리고 교육과 사회 봉임에 바친 선생의 숭고한 이념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뜻있는 이들의 정성을 모아 이 동상을 건립한다.

19871015

 

운현궁

 

지석영 선생 집터에서 삼일대로를 따라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운현궁이 있습니다. 운현궁은 사적 재 25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12살까지 살던 곳으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집이었습니다. 운현은 기상관측을 맡아보던 서운관 앞에 있는 고개 이름이며, 고증이 임금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였기 때문에 운현궁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고종 임금이 된 이듬해인 1861년에 흥선대원군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노안당과 노락당을 지었다. 1869년 무렵에는 별당인 이로당과 지금은 운현궁에서 나뉜 영로당을 지었다. 흥성대원군은 이곳에서 젊은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10여 년간 국정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경에는 용산의 조선총독 관저와 비슷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운현궁 양관을 지었다. 운현궁은 창덕궁과 이어져 있어 규모가 상당히 컸으나, 점차 영역이 줄어들었다. 운현궁은 홍선대원군에서부터 고종, 그의 손자인 이준용, 그리고 이우에 이르기까지 조선후기 왕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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