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투어 * 민영환 순국지사를 만나다 - 민영환 선생의 집터, 동상, 자결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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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투어 * 민영환 순국지사를 만나다 - 민영환 선생의 집터, 동상, 자결 터

by yeonjaei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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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투어 * 민영환 순국지사를 만나다 - 민영환 선생의 집터, 동상, 자결 터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는 서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종로 인사동 일대를 탐방하였습니다. 인사동 일대 탐방 중에 민영환 순국지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민영환 선생의 집터와 동상, 그리고 민영환 선생의 자결 터가 서로 근처에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민영환 선생은 흥선대원군의 막내 처남 민겸호가 친아버지였는데, 따라서 고종황제와는 내외종 간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민씨 정권의 세도 속에서도 관직에 진출했고,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오늘은 민영환 선생의 집터와 동상, 그리고 자결 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민영환 선생의 집터

 

 민영환 집터라는 표지석은 서울 종로 우정국로에 있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앞 길가에 있습니다.

표지석에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집터(조계사 경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도 집터라는 표지석이 길가에 있지만, 민영환 선생 집터는 조계사 경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실제 서울 종로구 견지동 27-2 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민영환 선생의 동상은 우정총국 공원(시민광장) 내 우정총국 뒤편 있습니다. 민영환 선생의 동상 아래에는 민영환 선생을 기리는 내용과 동상 이전 등에 관한 글이 있어 읽어보며 옮겨 보았습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순국 지사이신 민영환 선생은 18617월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태어났으며, 명성황후의 종질로서 학식이 뛰어나고 정의감이 출중한 인재였다. 보수파였던 부친 민겸호와는 달리 1898년 독립 협회의 자주자강 운동을 적극 지지한 개화파 위정자였다.

 

1902년 이상재, 이상설, 이준, 이동휘, 양기탁 등과 개혁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에 이은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자 그는 고급 관료로서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1905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을사조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상소하고 조병세의 체포로 무산되자 2차 상소를 전개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자결 순국함으로서 국은에 보답하고 국민을 깨우쳐 주기로 결심하고 19051130일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결코 대한민국 2천만 동포"라는 제목의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와 자결로서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일깨웠으며,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운동과 애국계몽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데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나라가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모범을 죽음으로써 가르쳐 주었다.

 

이 사건 후 광무 황제는 금척대훈장을 내리고 충정이라는 시호를 추종하였고,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심과 국권 회복 운동에 끼친 공헌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현 동상은 1957년 건립되어 안국동 로터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율곡로 돈화문 입구인 와룡동 1번지로 옮겼다가 2003년 종로거리 3.1절 재현행사를 계기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 관리자 : 서울특별시 종로구청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우정총국 공원 내)

* 규모 : 동상 둘레 3.3m, 높이 5m

 

단기 4194830일에 나고, 단기 42381130일 오후 6시에 순국하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 자결 터

 

민영환 선생 자결 터는 조계사에서 종로 방향으로 우정국로를 쭉 내려가다가 태화관길로 들어가면 공평 도시유적 전시관이 보입니다.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하나투어빌딩(SM면세점)이 나오는데, 바로 그 빌딩 앞에 충청공 민영환 선생 자결 터 기념비가 있습니다.

 

한말의 충신 민영환 선생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1130일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상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이라 하였답니다.

 

1905년 강제로 당한 을사조약 당시 계정 민 충정공께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에 실패한 끝에 회나무골 이인식씨 사랑방에 피신하여 1130일 우리 겨레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그 옛터가 바로 이것이다. 

가운데 노란판에 쓰인 글은 민 충정공 친필 유서입니다.

 

민 충정공께서 남기신 말씀 

아아! 나라와 겨레의 치욕이 이에 이르러 장차 생존경쟁에서 다 죽으오리. 무릇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살게 되나니 여러분은 어찌 모르리오. 영환은 한갓 죽음으로써 황은에 보답하옵고 이천만 동포 형제께 사죄하오.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구천 아래에서 여러분을 돕도록 하오리. 다행히 우리 동포 형제 이천만이 곱절이나 더 분발하여 뜻을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일치단결하여 온갖 힘을 내어 자유 독립을 되찾게 되면 죽은 이 몸이 저승에 가서도 기뻐 웃사오리.

아아! 조금도 실망 마르시오. 대한민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 말씀드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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