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유산 투어 - 서울 문묘와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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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투어 - 서울 문묘와 성균관

by yeonjaei 2020.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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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투어 - 서울 문묘와 성균관 

 

어제는 서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 문묘와 성균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 성균관대학교 입구에 있으며,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버스를 타고 성균관 대학교 입구 정류장까지 가서 성균관대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하며,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조선 시대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이곳은 유교의 중요한 사당인 동시에 유학을 가르치는 최고의 학교였습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1398(태조 7)에 처음 세워졌으나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번 고쳐 지었고, 1869(고종 6)에 크게 수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를 포함하는 영역이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제사 공간이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교육 공간입니다 

명륜당 동쪽으로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인 진사 식당을 비롯한 관리를 위한 부속 시설들이 있습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방 향교를 포함한 문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울 문묘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 말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침체되기 시작해 1895(고종 32)부터는 갑오경장의 여파로 인해 교육 기능을 상실한 채 문묘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탕평 비각과 하마비

 

성균관대학교 입구(성균관) 왼쪽으로 탕평 비각과 하마비가 있습니다. 비각 안의 태평비는 1742(영조 18)에 세운 것으로 영조는 지나친 당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이 비를 세워 그 의미를 널리 알렸습니다.

영조가 직접 쓴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寡小人之私意라는 비문은 두루 사귀어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마음이다.”라는 뜻입니다. 

또 비각 오른쪽의 하마비에 새겨진 大小人員皆下馬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라.”는 뜻입니다. 종묘나 궁궐의 문 앞 등에도 하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서울 문묘와 석전대제

 

서울 문묘 지역은 조선 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입니다대성전을 중심을 하는 제사 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묘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에게 석전제를 드리는데, 이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합니다. 석전대제는 일반적으로 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제사 의식이며, 문묘에서 치러지는 석전대제를 위한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합니다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지는 석전대제는 엄숙한 제례 절차와 더불어 기악과 성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그 원형이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만 남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대성전과 그 주변

 

서울 문묘 지역으로 들어가면 대성전이 보입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 공간입니다.

 

남쪽의 삼문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했으며, 가운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 음식을 차리는 전사청,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했습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성현들을 모시는 유래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울 문묘는 1398(태조 7)에 처음 지었습니다.

 

앞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은 문묘를 창건하고 고쳐 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입니다. 석봉 한호(1543~1605)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명륜당과 그 주변

 

대성전에서 위쪽으로 문을 지나면 명륜당이 보입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기관입니다.

1398(태조 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 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6(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습니다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입니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륜당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합니다.

 

향관청

 

존경각 오른쪽으로 향관청이 있습니다. 향관청은 원래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나, 주로 제사 업무를 주관하는 관리들의 사무실 및 공관 역할을 하였습니다.

 

 

향관청 좌우에 있는 동월랑과 서월랑은 성균관의 감사를 담당하는 감찰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입니다.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입니다 

 

성균관에서는 복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복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마다 원점을 하나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연대

 

 

하연대는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곳입니다. 하연대 왼쪽의 커다란 동삼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평상시에는 닫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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