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 문화유산 답사 - 나석주 의사 동상, 장악원, 우당 이회영 길,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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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 문화유산 답사 - 나석주 의사 동상, 장악원, 우당 이회영 길,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by yeonjaei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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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 문화유산 답사 - 나석주 의사 동상, 장악원, 우당 이회영 길,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어제는 서울 중구 문화유산 답사로 을지로를 둘러보았습니다. 지하철 3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하차, 5번 출구로 나와서 을지로2가쪽으로 걸어가며 답사하였습니다. 순서는 나석주 의사 동상 - 장악원 - 우당 이회영 길과 이회영 흉상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순입니다.

 

나석주 의사 동상

 

 

을지로입구역에서 을지로 2가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외환은행 본점(서울 중구 을지로 66)이 나옵니다. 그리고 외환은행 본점 바로 오른쪽으로 나석주 의사 동상과 함께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 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나석주 의사는 우리 민족의 항일의지를 일깨워 준 분으로, 의거 기념 터 표지석에는 이곳은 192612월 나석주 의사가 일제 동양척식회사에 투탄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 지배는 총독부나 군경을 통해서만 이뤄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는 경제 침탈의 첨병이자 총본산이었지요.

 

황해도 재령 출신의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는 19266월 톈진에 체류 중이던 유림대표 김창숙과 모의하여, 19261228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잇달아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은 아깝게도 불발이 되었지만, 나 의사는 권총으로 7명의 일본인을 살상하고는 도주하다가 탄환이 떨어지고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장악원 터

 

외환은행 본점 바로 앞에는 장악원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의 편찬, 교육, 행정을 맡아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입니다. 

장악원은 조선 초기 장악서와 악학도감의 전통을 전승한 1470(성종 1) 이후 1897년 교방사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공식적으로 사용된 국립음악기관의 명칭이었습니다. 현재 장악원의 전통 일부를 국립국악원에서 계승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당 이회영 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길가 오른쪽에 유안타 증권 맞은편에우당 이회영 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이회영 선생(1867~1932)은 서울 명동 출신으로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형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 모든 가족이 중국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여 이들이 독립전쟁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1920년대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을 주도하다가 1932년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여순 감옥에서 고문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서울 중구청에서는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이곳을 2017920우당 이회영 길로 명예 도로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우당 이회영 흉상과 집터

 

우당 이회영 길 안내판에서 오른쪽으로 이회영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울 YWCA 회관이 나오고 바로 지나 우당 이회영 흉상과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라는 표지석(서울시 중구 명동1120)이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표지석에는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과 이시영(1869~1953)1910년 건영, 석영, 철영, 호영 등 나머지 4형제와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 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시영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재임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흉상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 표지석은 명동의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이면서 명문가 자손이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 일가족 전체와 함께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운용하며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공적을 기리며 흉상과 집터를 세웠다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다음은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를 찾았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는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지하철 을지로3가역 8번 출구로 나와 충무로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명보아트홀(과거에는 명보극장)이 보이고, 그 앞 인도 끝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위치는 서울시 중구 인현동1(명보아트홀 앞)이며, 서울특별시에서 198510월에 설치한 것입니다. 

표지석에는 이순신(1545~1598)은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한산도 등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었다. 선조 31(1598) 노량에서 전사하였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시조와 한시 등을 많이 남겼다고 쓰여 있습니다. 

생가터 표석 근처에서 가판대를 운영하는 이종임 할머니는 30년이 넘게 매일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을 닦고 있으며, 매년 이순신 탄생일에는 술과 과일을 차려 제사도 지낸다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조선군을 이끌고 왜군과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내었습니다. 

1643년 인조가 그에게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688(숙종 14)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6(숙종 30) 충청남도 아산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가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와 그리 멀지 않은 근처에 또 하나의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주물 동판으로 만들어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131-2 신도빌딩에 있는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 라는 안내판입니다.

 

이곳 안내판에는 "많은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충무공 이순신 생가 터를 이곳으로 추정하여 2017428일 이 안내판을 설치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가 표지석만 덜렁 위치하고 있고, 또한 그 위치마저 정확하지 않아 두 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에 대해 왠지 제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그 위치가 서로 가까운 곳에 있기에 정확한 위치에 대한 정립과 안내판 등의 조정이 빠른 시일 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지하철 을지로3가역 부근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리’,'충무공 이순신 장군 승전 연혁' 이라고 쓰여진 바닥의 표시들을 볼 수 있었는데요, 이 또한 그 수고에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작고 흐릿해 잘 보이질 않아 많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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