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 * 한양도성 4대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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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 * 한양도성 4대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by yeonjaei 2020.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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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 * 한양도성 4대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요즈음 문화유산 답사로 한양도성을 탐방하고 있는데, 오늘은 한양도성 중에서 4대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1396)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서소문(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특히 동서남북 4대문에는 유교의 4가지 덕목인 , , , 를 담았다.

  

숭례문

 

 

숭례문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 29에 있으며,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과 함께 우리나라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성문이다. 1396(태조 5)에 시작하여 1398(태조 7)에 완성되었는데 1448(세종 30), 1479(성종 10), 1868(고정 5) 등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를 통해 잘 보존되어 196212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문 이름은 유교의 덕목인 인, , , 지를 따서 지었다. 숭례문은 이 가운데 '예를 숭상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를 쓴 인물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 숭례문 화재로 현판이 일부 손상되어 양녕대군의 위폐를 모신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 탁본과 근대 시기에 촬영된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쓰인 성문인 동시에,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나라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또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시킬 때 관료들이 숭례문 밖에서 전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조(1724~1776)가 숭례문 문루에서 죄인을 다스렸다거나, 정조(1776~1800)가 수원 현륭원에 행차할 때 숭례문 안팎에 척후와 복병을 배치 하였다거나, 순조(1800~1833)가 능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신주를 숭례문 밖에서 맞이했다거나 하는 기록 등을 통해 숭례문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과 주변에 군사를 배치하여 도성 내부의 왕궁과 백성을 파수한 것은 물론 통금 시간(2~5)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성문 여닫는 신호는 종이나 북을 쳐서 알렸는데, 2경에 성문을 닫는 제도를 '인정', 5경에 성문을 여는 제도를 '파루'라 하였다. 숭례문에 종을 달았다는 기록은 1425(세종 7) 4월에 처음 보이고, 이후 종을 쳐서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는 기록이 1536(중종 31), 1594(선조 27), 1598(선조 31) 세 차례 보인다.

 

숭례문은 화강암을 높이 쌓아 만든 홍예문(무지개 모양 문)을 출입구로 삼아 도성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으며, 그 위쪽에 2층 목조 건물(문루)을 세웠다. 2층 문루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동서 양측에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문루 둘레에 전통 벽돌 담장을 두르고 돌계단과 만나는 곳에 작은 문을 내어 문루 출입구로 삼았다. 문루 하층 내부 바닥 가운데 1칸은 마루를 깔고 나머지는 모두 흙바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층마다 모두 겹쳐마로 만들어졌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라 불리는 장식용 기와를 각각 세워 지붕에 위엄을 더하였다.

 

창건 후 600여 년 동안 수많은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건재했던 숭례문은 2008210일 발생한 방화로 목조건물인 문루 일부분이 불에 탔다. 그 후 2008년부터 2000년까지 약 2년간 정밀 실측 조사와 구조 안전성 검토를 마쳤으며, 20102월 복구 공사에 착공하여 201354일 공사를 완료한 다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에 있으며,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방위하기 위하여 1398(태조 7)에 세운 문이다.

 

지금의 흥인지문은 1869(고종 6)에 다시 세운 것이다. 속칭 '동대문'이라 부른다. 당시 서울 성곽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 4대문에는 각각 인···지의 글자를 넣어 지었는데, 그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이라고 하였다. 현판에 특별히 지()를 넣은 것은 동대문 앞의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라고 한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 통로를 내고, 그 위로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흥인지문은 현재까지 590년간 내려오는 동안 수차에 걸친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그 원형만은 현재까지 보전되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유일하게 옹성이 있는 성문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 옹성은 곡성 또는 치성이라고 한다.

 

흥인지문의 옹성은 태조 6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으며,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적을 방어하기에 부족한 자연조건을 인공적으로 보충하려 하였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돈의문

 

 

돈의문은 종로구 평동에 있었으며, 한양의 4대문 중의 하나로 서쪽의 정문이다. 한양 도성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이라는 명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새문’, ‘신문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한양도성의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형체도 없이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문이 돈의문이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경성도시계발계획에 따라 전차 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헐려 돈의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은 현판뿐이다. 1749년 제작된 돈의문 현판은 1915년 돈의문이 철거되면서 사라진 뒤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돈의문의 현판은 한양도성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글씨는 유학 조윤덕이 썼다고 한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돈의문은 참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문이라 할 수 있다. 한양도성의 4대문 가운데 계속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양 성곽의 서쪽을 이리저리 헤매다 이곳에 자리를 잡을 만하니 일제에 의해 헐려지고만 대문이었다.

 

돈의문은 처음 태조 5(1396) 도성을 완성할 때 돈의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대문들과 함께 건설되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사직단 부근 사직동 고개(사직터널)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태종 13(1413) 풍수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건의해 숙청문, 창의문과 함께 폐쇄되고 그보다 더 남쪽인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새로 지어 이름조차 서전문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10년이 못 돼 1422(세종 4) 2월 도성을 대대적으로 다시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 자리가 높고 험하여 통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아예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보다 남쪽 지점인 정동사거리 강북삼성병원 앞에 새로 문을 세웠다. 이름도 본래의 명칭대로 돈의문이란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는데, ‘돈의문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를 넣어 만든 이름으로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돈의문은 서북쪽의 관문이자 의주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고, 중국에 사신이 가거나 중국 사신이 올 때 이 문을 통과하여 도성에 들어왔다. 이 문은 519년 동안 인정(매일 밤 10시경에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28번의 종을 치는 것)과 파루(매일 새벽 4시경에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33번의 종을 치는 것)에 문을 닫고 열으며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했다. 이를 통해 수도 방위뿐만 아니라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 조선총독부에 의해 헐릴 때 경매에 붙여졌다고 하는데,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단돈 205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가미가 16원 할 때니, 도성 4대문 중의 하나인 돈의문이 쌀 13가마니 값에 팔린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낙찰받은 목재 등의 가격보다 이 문을 헐면서 엄청난 보물이 쏟아져 나와 횡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숙정문

 

 

숙정문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으며,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이었으나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대문인 숭례문(예를 숭상한다)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태조 5(1396)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며, 연산군 10(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조선 중기 이후로는 숙정문이라고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숙정문은 방위상의 북대문이지만 거의 암문으로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숙정문과 창의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 두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다른 설은 이 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부녀자들의 품행이 음란해지기 때문에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도 아울러 전해지고 있다.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숙정문 안내소에서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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