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주변 문화유산 투어 - 구 서울역사, 강우규 의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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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주변 문화유산 투어 - 구 서울역사, 강우규 의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 터

by yeonjaei 2020.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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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주변 문화유산 투어 - 구 서울역사, 강우규 의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 터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는 서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역 주변을 탐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서울역 주변 문화유산 투어 중에서, 그 첫 번째로 구 서울역사와 강우규 의사 동상, 그리고 3·1독립운동 기념 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구 서울역사

 

구 서울역사는 서울역 오른쪽에 있습니다. 이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역사로서,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하 1, 지상 2층의 돌·벽돌 혼합 조적조 건물로서, 설계는 일본인 츠카모토 야스시가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 철도의 남대문 역사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19226월부터 19259월까지 르네상스풍의 절충주의 건축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구 서울 역사는 고전주의 건축의 대칭적 구성과 고전주의 건축 형식에서 벗어난 중앙돔과 소첩탑, 그리고 좌우 양날개의 모습이 특징적인 건축으로, 스위스 루체른 역사를 모델로 디자인되었습니다. 1층 중앙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합실이 위치하였으며, 2층에는 서양식 레스토랑과 역무원의 사무공간이 위치했었습니다.

 

해방 후 서울역은 교통과 물류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57년에 남부 역사, 1969년에 서부 역사를 신설하였고, 1974년에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 되면서 전국 철도의 중심이자 서울 대중교통의 허브로서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이 보편화되고 2004년 고속철도(KTX) 개통으로 구 서울역사의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이후 1925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는 공연이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문화복합공간인 문화역서울 284’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통일 후에는 대한민국과 유럽, 아시아 각지를 연결하는 관문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구 서울 역사 앞 약간 오른쪽에는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이 있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일제 강점기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토를 이곳 서울역에서 폭탄으로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고 거사에 실패하여 순국하였습니다.

 

강우규 의사 동상 뒷면에 있는 강 의사에 관한 이야기와 동상 앞면에 있는 192011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절명시를 소개합니다.

 

강우규 의사는 185965일 평양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1883년 함경남도 흥원군 용안면 영덕리로 이주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 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셨고, 1910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셨다.

 

그 후 1915년 길림성 요아현 신흥동으로 이주, 광동 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와 기독교 전도 사업을 통한 민족계몽 운동을 펼치셨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노인 동맹단의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셨다.

 

191985일 폭탄을 품은 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에 도착, 92일 남대문 역두(현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신임 총독 사이토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 세계 만방에 대한의 독립정신을 알리셨다.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가 감회가 없으리오

 

3·1 독립운동 기념 터

 

구 서울역사(강우규 의사 동상)에서 서소문 역사공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서울 역전우체국 바로 못미처에 ‘3·1 독립운동 기념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표지석에는 “19193·1운동 당시 시민 학생 수천 명이 모여 제2차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던 곳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표지석에 있는 바와 같이 이곳에서는 191935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과 함께 2차 독립만세 운동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그간 경성에서는 191931일 독립 만세운동 이후 사흘간 이렇다 할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33인의 민족 대표 모두 붙잡혀 가 만세 운동도 일과성 사건으로 가지 앉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학생들이 주도한 제23.1 운동이 군중의 가슴에 다시 한번 불꽃을 터뜨린 것입니다. 당시 이곳 제23.1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대략 1만가량, 또는 그 이상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보고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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