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문화유산 투어 - 이준 열사 집터, 능성위궁 터, 재동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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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문화유산 투어 - 이준 열사 집터, 능성위궁 터, 재동 백송

by yeonjaei 2020.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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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문화유산 투어 - 이준 열사 집터, 능성위궁 터, 재동 백송

 

 

 

안녕하세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요즈음 계속해서 북촌 일대 탐방을 포스팅하고 있네요.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그만큼 볼 것도 둘러볼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오늘은 북촌 중에서도 북촌로 일대의 이준 열사 집터와 능성위궁 터, 서울 재동 백송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집터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창덕궁 방향으로 20~30m 걸어가면 하나은행 안국지점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은행 안국지점 왼쪽으로는 153안국 빵집이 있는데, 바로 하나은행 안국지점과 153안국 빵집 사이에 '이준 집터'라는 안내 표시가 있습니다.

안내 표시에는 "이준(1859~1907)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될 때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190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인 상점을 연 곳이기도 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음을 알리고 국권 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세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대한제국 초대 검사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1907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그는 고종 황제의 위임을 받아 국제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이며,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2차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일본의 지속적인 간섭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는 며칠 후 자신의 호텔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음모에 울분을 못 이겨 병사(분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을사보호조약' 위반 행위로 몰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 순국한 이준과 이위종은 무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고종을 강제퇴위 시킨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켜 주권 침탈을 가속화하였습니다. 

 

영조가 딸 화길옹주에게 지어준 능성위궁 터

능성위궁 터는 이준 열사 집터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가다가, 북촌로로 좌회전하여 조금 올라가면 헌법재판소 별관이 나옵니다. 헌법재판소 별관 바로 못미처에 '능성위궁 터'가 있습니다.

이곳은 헌법재판소 별관 증축을 위해 땅을 파자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지은 건물 6동에 흔적인 유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를 위해 사위인 구민화에게 지어준 집인 능성위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후 이곳에는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 민영익의 집, 고종 때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했던 외아문, 경기여고의 전신인 한성고등 여학교, 창동 여고의 부속 건물 등이 들어섰습니다.

옹주의 집에서 정치인의 집, 관청, 학교 등으로 변화 하면서 200여 년 역사를 압축하고 있는 땅인 셈입니다. 이 중 가장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능성위궁의 유구와 창덕여고 부속 건물의 하부 콘크리트 구조물을 남쪽으로 4m, 동쪽으로 6m 옮겨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서울 재동 백송

서울 재동 백송은 서울 종로구 재동 35번지 헌법재판소 안에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고,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높이 17m, 밑부분의 둘레는 3.82m에 달하는 백송 나무입니다. 나무의 줄기는 나무의 밑부분에서 75센티 정도의 높이에서 두 개로 갈라져 자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중국의 북경 부근이 원산지로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송 나무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으나, 번식력이 매우 약해서 그 수가 적으며, , 원산지인 북경에서는 아름드리나무로 자란 거목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백송 나무는 늘 푸른 큰키나무로 잎이 3개씩 뭉쳐나는 삼엽송에 속합니다.

나무의 색깔은 어릴 때는 회청색이고,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벗겨져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 백송, 또는 백골송, 백피송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원수나 풍치수로서 이용될 뿐이지만, 중국에서는 건축 재료로도 이용되고 종자는 직접 먹거나 기름을 짜는 데 쓰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경기도의 고양과 이천, 경남의 밀양, 충북의 보은, 충남 예산 등지와 기타 지역에서 몇 그루가 자랐는데, 이 가운데 크기가 큰 것 몇 그루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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