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역사문화 탐방 - 백인제 가옥과 손병희 선생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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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역사문화 탐방 - 백인제 가옥과 손병희 선생 집터

by yeonjaei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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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역사문화 탐방 - 백인제 가옥과 손병희 선생 집터

 

안녕하세요~^^

얼마 전 서울 종로 북촌 일대 역사문화 탐방의 일환으로, 북촌 한옥마을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 오늘 그중에서 백인제 가옥과 손병희 선생 집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백인제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716(가회동 93-1)에 있는데,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서, 헌법재판소 쪽으로 길을 건너 북촌로를 따라 약 500m 정도 쭉 올라가면 가회동 주민센터가 나옵니다.

 

그리고 주민센터를 바로 지나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백인제 가옥입니다. 북촌로에서 백인제 가옥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손병희 선생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백인제 가옥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입니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근대를 품은 백인제 한옥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 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 한옥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입니다.

 

정원에서는 당당한 사랑채를, 중정에서는 넉넉한 안채를, 그리고 후원에서는 아담한 별당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백인제 가옥은 우리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한자리에 모인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백인제 가옥 백년사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한 이래 한성은행, 최선익 등을 거쳐 1944년 백인제 선생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습니다. 한성은행이 소유했던 시절에는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이후 소유자인 최선익은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로, 1932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입니다.

 

1944년 이후에는 당시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였던 백인제 선생과 그 가족이 소유하였으며,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9년 서울시에서 인수 후 문화재 개·보수 공사를 거쳐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여 20151118일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백인제 가옥 관람 안내

 

* 관람 시간 : 오전 9~ 오후 6(입장 마감 17:30)

* 휴관일 : 11,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

* 관람 요금 : 무료* 관람 안내 문의 : 02-724-0232, 0200

* 예약제(해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사이트를 이용합니다.

 

 

손병희 선생 집터

 

북촌로에서 백인제 가옥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손병희 선생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표지석에는 손병희(1861~1922) 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 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은 19191월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세우고 기독교계와 불교계와 연합, 민족대연합전선을 구축하고 3·1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그는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에서도 수장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고 3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고 일제에 피체되었습니다. 그는 옥중과 법정에서도 일본인 검사나 판사에 대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의연하게 투쟁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옥하여 요양 중 순국하셨습니다.

 

참고로 천도교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제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1824~1864)1860년에 세운 민족 종교인 동학을 1905년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1861~1922)가 개칭한 종교입니다. 그리고 천도교의 대표 기관은 천도교 중앙총부(수운회관)이며, 그 산하에는 각 지방에 교구 및 전교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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