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탐방 - 윤보선 대통령 가옥과 조선어학회 터
본문 바로가기
여행축제방송연예

북촌 탐방 - 윤보선 대통령 가옥과 조선어학회 터

by yeonjaei 2020. 7. 19.
반응형

북촌 탐방 - 윤보선 대통령 가옥과 조선어학회 터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는 서울 종로 문화유산 답사의 일환으로, 북촌 윤보선길 일대를 탐방하였습니다.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으로,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북촌 탐방 중에 윤보선길에서 만난 제2공화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대통령 가옥(윤보선가)조선어학회 터에 대해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가옥(윤보선가)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몇 걸음 걸으면 바로 윤보선 대통령 가옥’, ‘윤보선길이라는 방향 표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방향 표시 방향으로 윤보선길(길바닥에는 별궁길이라고 적혀 있음)을 따라 쭉 올라가면 왼쪽으로 안동교회가 보입니다. 안동교회는 구한말 양반들이 세운 교회라고 합니다.

 

안동교회 맞은 편이 바로 제2공화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대통령 가옥(윤보선가)입니다. 구한말 민간가옥으로는 가장 컸던 99칸짜리 대저택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비개방 상태입니다.

 

윤보선 대통령 가옥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임시 의정원 의원과 제4대 대통령, 상공부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정치인 겸 독립운동가 윤보선의 사저였습니다. 99칸의 대저택으로 일부는 해방 직후 6.25 전쟁 때 일부 소실되기 전까지 형태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사적 제438호입니다.

 

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의 저택으로도 유명한 이 집은 1870년대에 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고종은 이 집을 사서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박영효에게 하사하였습니다. 금릉위 박영효는 철종의 후궁인 숙의 범씨의 소생 영혜 옹주와 혼인한 철종의 부마였습니다.

 

이 집은 그 후 주인이 바뀌었다가 전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1918년 후손을 위해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는 전통가옥입니다. 안국동 윤보선 가옥, 또는 안국동 사저, 윤보선가로도 부르며, 경내가 넓어서 일명 안동궁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대통령 윤보선 가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으로 전통과 현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는데요. 특히 조선말기 세도가의 위용과 동서양 주거 건축 양식의 혼합으로 주거 건축 발달사 연구에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는 곳으로 북촌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라 합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대지 1,411, 건평 250평 규모의 위용을 갖추고 있으며 대문채, 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아래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산정이라고 불리는 사랑채는 해위 윤보선 대통령과 가장 인연이 깊은 곳으로, 한국 현대정치사의 무대로 한국민주당의 산실이었고, 한국 야당의 회의실이라고도 불렸습니다. 1980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던 시기에 해위 윤보선이 양 김씨를 불러 후보 단일화를 당부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해위 윤보선 선생은 4.19혁명이후 이승만정권이 물러나고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1960.08~1962.03)에 선출되었고, 박정희 정권(1963~1979)때에는 야당의 총수를 두루 거치면서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가옥은 이러한 윤보선 전대통령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어학회 터

 

윤보선 대통령 가옥 대문에서 조금 위쪽으로 걸어가면 삼거리 모퉁이에 조선어학회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표지석에는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 말과 글을 금지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우리말을 지키려 한국어 사전 편찬에 몰두했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 큰사전을 완성하였습니다.

 

참고로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를 연구한 학자들을 탄압한 사건입니다.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을 전개하여 조선 내에 일본어를 보급하고 조선어를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1921년부터 한글학자들은 정체성을 확보하고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국어학 운동,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결국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적이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한다는 등의 구실을 들어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릅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