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문화유산 투어 - 보신각과 3.1독립운동 기념 터, 척화비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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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문화유산 투어 - 보신각과 3.1독립운동 기념 터, 척화비 있던 곳

by yeonjaei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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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문화유산 투어 - 보신각과 3.1독립운동 기념 터, 척화비 있던 곳  

 

 

어제는 서울 문화유산 답사의 일환으로 종로 사거리에 있는 보신각과 3.1독립운동 기념 터, 척화비 있던 곳을 둘러보았다. 지하철 종각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다.

 

보신각

 

보신각 또는 종각은 서울 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한옥 누각이다.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년(태조 5) 창건했다가 1869년(고종 6), 197년 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의 편액은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명명한 고종이 직접 쓴 현판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전소되었다. 현재의 편액은 1953년 중건 당시에 내걸었으며, 편액의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썼다. 1979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보신각은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통 목조 건물이다.

 

매년 양력 12월 31일12시를 기해 보신각종33번 치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는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새해맞이 행사이다. 보신각의 타종은 12월 31일 밤 이외에도 3월 1일 삼일절, 8월 15일 광복절 등 국경일 낮 12시에 기념 타종 행사를 갖고 있다. 

 

보신각 새종 만든 경위

 

여기 보신각에 본디 있던 옛종은 조선 세조 1468년에 만들어져서 처음엔 사찰에서 불사에 쓰이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19년 광해군 11년부터 이곳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여 시민들에게 새벽과 밤을 알려왔는데, 그만 일제시대에는 민족 수난의 상징처럼 벙어리가 되었었고, 해방 후에야 다시 울리기 시작해서 제야에는 새해 새아침을 알리는 축복의 종으로 또한 3.1절과 8.15에는 민족의 독립을 일깨우는 광복의 종으로 겨레의 가슴 속에 울려 새겨지며 517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유서 깊은 옛종의 수명이 다함에 따라 그것을 영구 보존하고 이와 갈음할 새종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소리가 높아지자 서울신문사의 발의로 1984120일 보신각종 중주 위원회가 발족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온 국민의 성금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그 제작을 전문가들에게 맡기어 540여 일 만에 새종의 완성을 보아서 뜻깊은 광복 40돌을 맞아 첫종을 치게 되었다.

 

이 새종은 단순한 옛종의 복원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양식과 현대 감각을 조화시켜 만든 예술과 과학의 어우름으로써 약진 한국의 슬기와 솜씨가 배어 있으며, 면면한 이 나라의 시급한 통일과 무궁한 번영을 축원하는 온 겨레의 마음과 정성이 스며져 있다. 이처럼 이 새 종에는 범국민적인 호응과 협력이 있었으나 여기에 그 사실을 일일이 밝히지 못하고 오직 이 일을 맡아 앞장서 애쓴 몇 기관과 몇 분들만의 이름을 아래에 새기며 모든 이들의 공덕을 함께 기리는 바이다.

 

1985815

주관 보신각종 중주 위원회

 

보신각 터

 

이곳은 조선 시대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종을 쳐서 알렸던 터다. 1396(태조 5) 처음 설치한 종루는 옛 서울의 중심부인 지금의 인사동 위치에 있었으나 태종 때 현 위치로 옮겼다.

 

도성 문을 열 때 치는 종을 파루, 문을 닫을 때 치는 종을 인정이라 했는데, 파루는 불교의 33천에 따라 33, 인정은 별자리의 28수에 따라 28번을 쳤다. 세종 때에 정면 5, 측면 4칸의 초대형 누각으로 지었으나 전란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거듭하면서 규모가 작아져 조선 후기에는 단층 전각이 되었다.

 

이 건물은 종고루, 종각, 인경전 등으로 불리었는데, 1895년 고종이 보신각으로 명명하였다. 1979년 세종 때의 규모에 맞춰 새 건물을 지었으며, 현재 걸려있는 종은 1985년에 제작한 보신각 새 종이고 옛 보신각 동종(보물 제2)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1독립운동 기념 터

 

보신각 왼쪽으로 ‘3.1독립운동 기념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즉 이곳은 19193.1 독립 만세 시위의 중심지로 4.23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이다.

  19193.1 독립운동 이후 국내외서 임시정부가 수립이 되었고, 그중 1919423일 전국의 대표들이 모여 이곳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조선의 독립을 준비할 목적으로 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당시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같은 해 9월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위에 있는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은 지하철 경복궁역 7번 출구에 있다.

 

척화비 있던 곳

 

보신각 정면 앞쪽 길가에는 척화비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척화비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배척하고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이곳에 있는 표지석에는 “19세기 후반 고종의 생부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서양인의 조선 침투를 방어 격퇴시켰다는 의미로 전국 주요 지역에 세웠는바 그중의 한 척화비가 있었던 곳이라고 적혀있다.

 

척화비는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후 세워졌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서울 종로사거리·강화·경주·부산진·함양군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세워졌다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 공사의 요구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부산광역시 용두산공원,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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