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왕산 나들이 -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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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왕산 나들이 -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by yeonjaei 2020.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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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오늘은 서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 종로구 인왕산에 있는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를 찾았다. 인왕산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조선 개국 초기에는 서산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인왕산 쪽을 바라보면 저 멀리 서쪽 중턱 기슭에 2개의 큰 바위가 서 있는데, 이 바위가 선바위다. 그리고 선바위 바로 밑으로 국사당과 인왕사가 있다.

이곳으로 올리는 길은 여러 길이 있는데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출발하여 아파트와 무악공원을 지나 올라 갈 수 있다.

 

 

 

 

인왕사

 

 

 

올라가다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인왕사이다.

이곳에는 많은 절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데, 그중 1918년에 창건된 인왕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조가 인왕사에서 조생 스님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의 후원으로 늦어도 1397년에는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주는 무학대사와 조생선사이며 매월 초하루 보름마다 내원당에서 법회를 올리고 강설은 호국인왕금가아반야바라밀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세종 때는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명칭을 인왕산이라 칭하고 사찰을 인왕사라 부르게 되었으나, 연산군 때 궁궐이 보인다 하여 복세암과 금강굴과 함께 인왕사도 폐사되었다. 그 후 복원되어 상당 기간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지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10년경 선바위를 중심으로 박선묵 거사가 선암정사를 지어 서웅, 탄웅, 자인, 대원 스님 등이 뒤를 이었으며 대원암, 보광전, 관음전, 극락전을 짓고 수도 정진하였다. 1942년에는 조계종 봉은사 말사로 편입되었고, 1977년에는 인왕사 내 5개 전각과 토지가 인왕사에 증여되어 1988년에 전통사찰 인왕사로 문광부에 지정 등록되었다.

 

 

국사당

 

 

인왕사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바로 국사당이 나온다. 이곳은 최영 장군, 무학대사, 이태조를 비롯한 여러 무신상을 모신 신당이다. 조선 태조 4(1395) 목멱산(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여 호국의 신으로 삼고 이를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목멱신사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는 지금의 남산 팔각정 부근에 있었으나 1925년 남산 중턱에 일제의 신사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사당이 선바위 곁으로 옮겨진 뒤부터는 바위와 국사당이 함께 무신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국사당의 제사는 국가에서 거행하는 굿의 성격이 짙었는데, 요즈음도 이곳은 무속신앙의 맥을 잇는 굿당으로 사용되어 일년 열두 달 굿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사당 안에는 최영 장군뿐 아니라 별상님과 산신, 칠성님 같은 여러 무신이 그려져 있는데, 이 무속도는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사당은 중요민속자료 제28호이다.

 

 

선바위

 

 

국사당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로 선바위가 보인다.

선바위는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참선하며 서 있는 것처럼 보여 ’() 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이라고도 불린다. 

선바위는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상이다. 바위 아래에는 가로 약 10m, 높이 7080cm의 제단이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 주변에 아무런 시설물도 없이 바위만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한다. 암석 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 바위라고도 한다. 

 

선바위는 조선 건국에 얽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성안으로 하느냐 성 밖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유인즉슨 이 바위를 성안으로 넣으면 불교가 왕성하여 유신이 물러날 것이요 밖으로 내놓으면 승려가 맥을 못 쓰게 되어 유교가 흥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태조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안쪽으로 성을 쌓은 자리만 눈이 녹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여 선바위를 밖으로 내놓고 성을 쌓았다. 이에 무학이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래서인지 당시까지 지배이념이었던 불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유교가 성행했다. 그 뒤부터 한양도성을 설성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으며, 바위는 선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인왕산을 바라볼 때면, 이 바위가 가장 눈에 띄는데 조선 초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것이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선바위는 암석숭배의 일종으로 이것이 전설화되고 또 불교와 무속신앙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지가 되었다. 상고역사실록에 의하면 도선국사는 인왕산과 선바위가 왕기가 서리는 길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민족 신앙의 대상이자 약 일억오천만년전 생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이 바위는 천년을 이어온 한민족 정신의 뿌리로서, 기도 정진하는 자는 꼭 소원을 이룬다는 일명 소원바위, 선바위로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또 이곳은 우국지사들의 은신처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선바위 앞에 서면 인왕산 거석들의 위용이 신성한 기운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듯하다.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희귀하게 생긴 선바위와 그 뒤 너럭바위 위에 있는 산신각에는 지금도 치성을 드리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197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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