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지처참 뜻 역사 방법 특징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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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일상

능지처참 뜻 역사 방법 특징 사례

by yeonjaei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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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지처참 뜻 역사 방법 특징 사례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되세요^^.

 

우리가 역사드라마를 보다보면 “능지처참을 당했다! 능치처참하라!” 등 능지처참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요. 오늘은 능지처참 뜻, 역사, 방법, 특징, 사례 등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능치처참 뜻

 

 

능치처참(凌遲處斬)은 능지처사(陵遲處死)라고도 하며, 대역죄나 패륜을 저지른 죄인 등에게 가해진 극형의 일종이다.

 

능지처참은 죄인의 살을 산 채로 회뜨는 형벌이다. 죄인을 죽인 뒤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에서 청나라까지 시행되었던 극형으로, 한국에서도 공민왕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 형벌이 집행되었다.

 

 

 

 2. 능치처참의 역사

 

능치처참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국가 시기에는 사형 집행에 걸리는 시간이 길고 죄인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 형의 폐지를 건의하는 의견이 있었으며, 일부 시대에는 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한다. 이 형벌은 점차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이 형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후 조선 초기에도 행해졌으며, 특히 연산군과 광해군 때 많았다.

 

인조 때에는 엄격하게 금지하였으나 실제로는 폐지되지 않다가 1894년(고종 31)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능치처참은 서양에서도 일부 행해졌다. 루이 15세를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다미앵은 처형 직전 불에 달군 집게에 의해 팔다리와 가슴, 배의 살이 떼어지는 등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팔다리가 네 마리 말에 묶인 뒤 사지가 찢어지는 참형을 당하였다.

 

 

 

 3. 능치처참의 방법

 

능치처참의 방법은 시대별로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죄인을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어 고정시킨 후, 작은 칼로 죄인의 살을 최대한 작게 계속해서 포를 떠서 잘라내는 것이었다.

 

보통 과다출혈이나 쇼크사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혈관을 피해서 살점만 도려내는 기술이 발달했다고 한다.

 

가슴을 도끼로 부숴 내장을 끄집어내고 목을 자르기 전에 이미 죄인이 죽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보는 군중들로 하여금 공포감과 준법심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잔혹한 사형으로서 대개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본래는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 시신에 거열형을 가하는 육시와는 차이가 있으나 혼용되기도 한다.

 

 

 

 4. 능치처참의 특징

 

능치처참은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럽며 고통스러운 방법에 해당하는 사형 방법이다.

같은 사형수라 해도 어지간히 큰 죄를 짓지 않는 한 능치처참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죄질도 아주 나쁜 데다가 괘씸죄까지 덧붙을 정도로 형을 선고하는 사람이 죄인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어야 선고 및 집행이 가능한 유사이래 최고의 형벌이었다.

 

속칭으로 살천도(殺千刀)라고 하는데, 천 번 칼질하여 죽인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실제로 죄인에게 6천 번까지 난도질을 가한 기록이 있다.

 

 

 

 5. 능치처참의 사례

 

능치처참에 처한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역사 인물들도 있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환관 유근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다 체포되어 3일에 걸쳐 하루 평균 2,000회의 칼질을 당했다.

 

한국에서는 공민왕 때부터 이 형벌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때에 이 형벌이 많이 행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사육신 등을 능지처참하고 효수하여 3일 동안 백성들에게 공개하게 한 기록이 있다. 광해군 때 허균도 모반죄로 능지처참되었다고 한다.

 

김옥균은 일단 죽은 죄수를 토막내어 널리 공공장소에 전시케 하는 형벌을 당했다. 김옥균은 1894년 한. 청. 일 3국의 제휴 위한 삼화주의를 제창했다

 

김옥균은 동양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청국의 실력자 리홍장과 의논하고자 텐진을 방문하던 중 동년 3월 28일 상해 여관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시체는 본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6. 결론

 

능치처참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극형의 일종이다. 죄인의 살을 산 채로 회뜨는 형벌로, 죄인을 죽인 뒤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이기도 하다.

 

이 형벌은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럽며 고통스러운 방법에 해당하는 사형 방법이다. 같은 사형수라 해도 어지간히 큰 죄를 짓지 않는 한 능치처참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죄질도 아주 나쁜 데다가 괘씸죄까지 덧붙을 정도로 형을 선고하는 사람이 죄인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어야 선고 및 집행이 가능한 유사이래 최고의 형벌이었다.

 

능치처참은 과거의 잔혹한 역사의 증거이자 인권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왠지 가슴이 아프다.

 

이상으로 능치처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 김옥균 이미지 출처 : 서울역사 아카이브 제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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