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여행,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무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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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 여행,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무악재

by yeonjaei 202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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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 여행,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무악재

 

 

 

 

오늘은 서울 서대문 여행으로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무악재를 찾았다. 오늘 찾아간 코스는 트레킹을 겸하여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입구에서 출발하여 안산 자락길을 봄과 같은 가벼운 마음을 걸어보며 무악재 하늘다리까지 가서 한참을 둘러보고 서대문독립공원 방향으로 하산하였다무악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으며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일컫는다.

 

 

또 무악재는 안산(296m)과 인왕산(338m) 사이에 있으며, 의주가도인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안산과 인왕산은 화강암 산지이고, 무악재는 두 산 사이에 형성된 안부이다. 무악재는 여러 번에 걸쳐 깎여 고개가 점점 낮아졌다. 무악재 지명은 무악재를 끼고 있는 안산을 무악이라고 하는데 이 산 이름 무악에서 비롯되었다. 무악재는 여러 별칭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삼각산 인수봉이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는 형세를 하고 있음으로 이를 막기 위해 무악산을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산, 즉 모악이라고 했고 그 고개를 모악현이라 하였는데 이 모악이 변해서 무악이 되었다고 한다.

  

 

영조 45년에는 영조가 부왕 숙종의 명릉 역사를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명릉 쪽을 바라보면서 부왕의 생전 모습을 그리워하며 추모했다 해서 추모현이라고도 하였다.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조선 태조가 도읍 터를 찾을 때 하륜이 이곳 무악 남쪽을 적극 주장하므로 태조가 무학대사를 데리고 와서 답사하였으므로 무학재라 하던 것이 무악재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는 중국 사신의 유숙소인 모화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하여 모화현이라 하였다. 그 외에도 안현, 길마재, 모래재, 사현, 봉화재, 봉우재, 홍제동 고개 등 참 많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고개 하나에 여러 개의 이름이 붙어있는 무악재는 매우 험한 고개였으므로 온갖 짐승들이 서식했다고 한다. 즉 무악재는 가파르고 길목이 좁았으며 양편에는 밤나무가 많았고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산적과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무섭고 험악한 길이었다. 따라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러 사람을 모아서 넘어갔기 때문에 모아재라 부르던 것이 모악재로 변하고 다시 무악재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사신당이 있었던 청구아파트 앞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내동 못자리골에 가면 사신당이 있는데, 이 사신당은 조선시대의 굿당으로 중국 사신이 산적과 호랑이를 피해 무악재를 무사히 넘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고 다녀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신당은 서대문구 홍제동 고개 말바위 아래쪽(현재 청구아파트 앞쪽)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으로 인해 건너편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앞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빌라를 짓게 되자 불광동의 불광사 앞으로 옮겨졌다. 불광사 앞에서 다시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272번지(못자리골)로 이주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2005.2.11) 위 사진은 사신당이 있었던 현 서대문구 홍제동 청구아파트 앞이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무악재는 예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호랑이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악재는 지금은 통일로로 연결되는 탄탄대로이지만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만 해도 혼자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험하고 무서운 고개였다. 주로 경기도 고양군에 사는 나무장수들이 넘어 다녔던 무악재는 서울에서 가장 험난한 고개로 이름나 있었고 가끔 호랑이가 나타나 행인을 해쳤다고 한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라는 속담까지 있다. 

 

   유인막이 있었던 서대문독립공원

 

이에 대한 방편으로 나라에서는 지금의 서대문독립공원 자리에 유인막을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켰다. 군사들은 행인들을 유인막에 머물게 하였다가 10여 명이 되면 고개 넘어까지 앞뒤에서 호송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것도 그냥 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인막에 주둔하는 군사가 화송총을 들고 앞장 서서 행인들을 선도하였고, 비 오는 날이면 화송총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총 대신 활과 살통을 메고 행인들을 호위하였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으면 군인들에게 장교는 승진시키고, 하사관이면 면포 20필을 주고 천인이면 부역을 면제 시켜 주었다. 그리고 잡은 호랑이 가죽은 본인에게 주는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고 하니 그 당시 호랑이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유인막을 지키는 군사들이 행인들에게서 호송료를 받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을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유인막이 생긴 것은 잦은 호환 때문이었지만 이 유인막이 그토록 오래 지속된 것은 호랑이 때문이 아니라 그 나름의 부조리 때문이었다. ‘월치전이라 불리었던 호송료 갈취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였고 부수입이 좋아 다른 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도성민들 사이에는 무악재 호랑이 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어느 현감이 호랑이로 변신한 중을 호되게 호통쳐서 호랑이를 압록강으로 쫓아버렸고 이 사건 이후로 호랑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 한양에서 경기도 고양군까지 부친 묘를 참배 가는 박태성을 호랑이가 등에 태우고 갔다왔다 했다는 효자 박태성과 무악재 호랑이의 우정 이야기 등이 전해지기도 한다.

 

 

무악재는 조선 초기부터 유서 깊은 곳으로 한양의 북서쪽 경계이자 서도(황해도·평안도의 통칭)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조선 시대부터 의주를 비롯해 황해도·평안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특히 명·청의 사절들이 들어오는 길목의 관문 구실을 했고 고개 아래 현저동에는 영취락이 발달했다. 현재도 서울 시내와 서대문 외곽 지대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고개이다.

또한, 무악재는 국방·통신상 중요한 위치였는데, 무악재 왼편 안산 정상에는 조선 시대의 봉화터가 두 군데 있다. 이곳의 봉화대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회령까지 급보를 전하였다 

 

 

한편 무악재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에겐 한 많은 고개였다. 중국에 바리바리 조공을 보내고 거들먹거리는 사신을 맞이해야 했던 허리 부러지던 고개였고, 왕세자를 볼모로 보내고 오랑캐를 맞아야 했던 피 토하던 고개였다. 또 임진왜란 때 선조 일행이 북으로 피난 가면서 넘었던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고개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남북 양측군이 진퇴를 교차하던 곳이다. , 그때그때마다 국운이 흔들리고 역사가 새로이 쓰이던 고개였다.

무악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가파른 고개였으나 여러 차례 공사를 통해 고개를 깎아 낮추었다. 서북방의 의주로 통하는 무악재길을 의주로라 불렀으나 근래에 통일로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요즈음도 겨울에 눈이 오면 여전히 교통이 불편하다.

 

 

최근에 인왕산과 안산을 연결하는 무악재 하늘다리가 개통되었다. 서울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생태 다리 중 하나가 무악재 하늘다리이다. 이 도로는 19723월 통일로가 개통되면서 단절됐던 인왕산과 안산을 생태적으로 연결하여 생물 종 다양성을 증진하고 야생동물의 이동을 위해 45년 만인 201712월 하늘다리를 통해 이어졌다. 

오늘 서울 서대문 여행으로 이곳을 돌아보았는데,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무악재가 지닌 과거의 많은 사연과 슬픈 애환을 잊은 듯 많은 차가 재빠르게 넘나들고 있다. 앞으로는 이곳에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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