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문화유산 탐방 - 북촌 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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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문화유산 탐방 - 북촌 계동길

by yeonjaei 2020.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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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문화유산 탐방 - 북촌 계동길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는 서울 종로 문화유산 답사의 일환으로, 북촌 계동길을 탐방하였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자리한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북촌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대규모의 집이 헐리고 대신 소규모 근대식 한옥이 많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어제 북촌 계동길 탐방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나와 돌아볼 곳이 있어북촌로를 따라 쭉 올라가다가,‘고하길이라는 안내 표시를 따라 중앙고등학교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중앙고등학교에서 계동길을 따라 현대건설 사옥 방향으로 내려오며 탐방을 했습니다.

 

계동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14-3에서 계동 4-3까지를 잇는 도로입니다. 어제 주요 탐방지는 고하길 ~ 석정 보름 우물 ~ 유심사 터 ~ 계동 배렴 가옥 ~ 김성수 옛집 ~ 관상감 관천대 순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영상도 맨 밑에 올렸으니 많이 시청해 주세요^^

 

고하길

 

북촌 북촌로에서 계동길로 넘어가는 길에, 그리고 중앙고등학교 앞에 명예도로명고하길이라는 안내 표시가 있습니다. '고하길'의 원래 도로명은 창덕궁길이며, 북촌로로부터 고하 송진우 집터까지 350m 구간입니다.

고하 송진우 선생은 계동 중앙학교 교장으로 재직 시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몄고, 이는 19193.1 운동으로 결실을 맺어 3.1 운동 후 민족대표 48인 중 1인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후 국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을 당한 후 총독부의 압력으로 사장을 사임하기도 했습니다.

 

송진우 선생은 광복 이후 한국 민주당의 수석 총무에 추대되어 나라 세우기에 헌신하다 19451230일 원서동 자택에서 총격을 받고 서거하였습니다.

 

서울 종로구는 고하 송진우 선생의 민주 건국을 위한 업적,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24여 년간 왕래한 뜻깊은 이 길을 명예 도로명 '고하길'로 지정하였습니다.

 

석정 보름 우물

 

'고하길에서 계동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왼쪽으로 석정 보름 우물이 있습니다.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음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습니다.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던 석정 보름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데다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궁궐 궁녀들이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심사 터(3.1 운동 유적지)

 

석정 보름 우물에서 조금 내려가면 왼쪽 골목으로 유심사 터가 있습니다. 이곳은 3.1 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 운동 참여를 주도했다고 합니다.

 

한용운 선생은 3·1운동 때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시고, ‘신간회중앙 집행 위원을 지낸 독립 운동가이자, 한국 현대 시사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는 민족시인입니다. 

 

계동 배렴 가옥

 

유심 터에서 조금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계동 배렴 가옥이 있습니다. 계동 배렴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89에 있으며, 등록 문화재 제85호입니다. 

 

계동 배렴 가옥은 화가 제당 배렴(1911~1968)1959년부터 생애 말년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배렴은 청전 이상범을 사사하고, 전통 수묵 산수화의 맥을 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가옥이 위치한 가회동 일대는 대규모의 토지를 작게 분할한 택지들 위에 도시 한옥이 빽빽하게 들어선 지역입니다. 배렴 가옥은 형 안채와 자형 바깥채가 마주 보는 튼 자형 한옥으로, 1936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배렴 사후에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가, 2001년에 서울 주택 도시공사가 매입한 이후 2016년까지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계동 배렴 가옥은 문화예술 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김성수 선생 옛집 

 

계동 배렴 가옥에서 조금 내려가면 왼쪽 골목으로, 대동세무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김성수 선생 옛집이 있습니다. 이곳은 교육자이며 경계인이며 언론인으로서 민족 교육과 민족 자본 육성 및 언론을 통한 민족 계몽 운동에 주력하셨던 인촌 김성수 선생이 거주하던 집입니다.

 

이 집은 1918년 김사용에게서 인수하였으며, 2.8 독립선언 준비와 3.1 운동의 초기 준비 단계 등에 항일 독립투사들이 모인 밀회의 장소였으며, 또한 중앙 고보, 보성 전문, 동아일보 설립을 구상하는 등 일제의 강점 기간에 독립운동의 배후 지원 및 민족 교육, 민족 문화의 보급을 위하여 노력하였던 뜻깊은 장소입니다. 

 

관상감 관천대

 

계동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현대건설 사옥이 나오고, 이 사옥 앞 왼쪽으로 관상감 관천대가 보입니다. 관천대는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를 설치했던 대(), 현재 간의는 사라지고 대만 남아 있습니다. 관상감 관천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206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434(세종 16) 경복궁에 대간의를 만들고 이를 둘 대를 쌓았으며, 따로 소간의 2개를 만들어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각각 두었다고 했는데, 이 대도 이 무렵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통 관천대 또는 첨성대로 불리며, 소간의를 시설한 소관의 대였습니다. 화강석을 반듯하게 다듬어 쌓은 구조로, 높이가 3.46m이며, 상면의 크기는 2.4m × 2.5m입니다.

 

상부는 돌난간을 둘렀고, 가운데에는 소간의를 받쳤던 받침돌이 남아 있습니다. 북쪽의 돌쌓기는 다른 면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아마도 위로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던 흔적이 아닌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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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사옥에 들어선 이 터에는 조선 초 서운관이 있었는데, 이곳은 천문과 지리, 역산, 측후, 각루에 관한 일을 맡았던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관천대는 신라 첨성대, 고려 첨성대, 창경궁의 관천대( 보물 제851)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문학의 역사와 전문화 기기의 발전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서울 종로 문화유산 탐방 - 북촌 계동길(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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