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수릉’
본문 바로가기
여행축제방송연예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수릉’

by yeonjaei 2022. 9. 14.
반응형

◆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수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을 탐방하였는데, 오늘은 동구릉에 있는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인 수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동구릉은?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즉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개 능의 20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개의 능에 17()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917()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총 면적이 1915,890제곱미터나 된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수릉綏陵(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 능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합장릉

◎ 능의 조성 : 1855(철종 6), 1890(고종 27)

 

. 능의 구성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 능의 역사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순조 20)에 세상을 떠나, 경종의 의릉 왼편에 연경묘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 하였으며, 1846(헌종 12)에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다가 1855(철종 6)에 다시 천장론이 거론되어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고종 27)에 신정익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이야기

 

추존황제 문조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27(순조 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왕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손수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