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조선 1대 태조의 능, ‘건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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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조선 1대 태조의 능, ‘건원릉’

by yeonjaei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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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조선 1대 태조의 능, ‘건원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을 탐방하였는데, 오늘은 동구릉에 있는 조선 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동구릉은?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즉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개 능의 20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개의 능에 17()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9 17()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총 면적이 191 5,890제곱미터나 된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그리고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2. 건원릉健元陵(조선 태조의 능)

  

. 능의 개요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위치는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에 있으며, 능의 형식은 단릉이고 능은 1408(태종 8)에 조성되었다.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 능의 역사

 

1408(태종 8) 5 24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7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 9일에 발인하였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 황해도에서 2,000,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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