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출발, 서울 정동 일대 문화유산 답사 - 구 경성재판소,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독립신문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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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출발, 서울 정동 일대 문화유산 답사 - 구 경성재판소,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독립신문사 터

by yeonjaei 2020.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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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출발, 서울 정동 일대 문화유산 답사 - 구 경성재판소,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독립신문사 터

   

 

어제는 서울 근대 문화유산 답사로 덕수궁을 출발하여 서울 중구 정동 일대를 둘러보았다. 혼란과 상처를 겪으며 남겨진 흔적을 따라 둘러보는 것은 나름 큰 보람이 있었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 2번 출구로 나와 덕수궁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먼저 구 경성재판소(서울시립미술관)를 답사하고, 이어 배재학당, 정동 제일교회, 독립신문사 터 순으로 돌아보았다.

 

구 경성재판소(서울시립미술관) 

 

구 경성재판소는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61에 있다. 이 건물은 일제에 의해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 건물이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 독일공사관이 위치하고 있던 곳이었고, 이후 조선 말 개화기 때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로 1928년 일제에 의해 경성재판소 건물로 신축되었다

 

이곳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여 고문하며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중심이 되었다. 광복 후 1995년까지 대법원 건물로 사용되다가,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간 후 건물 전면은 그대로 살리고 뒷면은 헐고 보수하여 현대적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하나의 건물 안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는 역사적·건축사적 의의가 높이 평가되어 2006년에는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오래된 나무 등으로 우거진 미술관 진입로에는 각종 조각품을 전시해놓아 관람객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술적 향취를 만끽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배재학당 

 

배재학당은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1119에 있다.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8월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 처음에는 주변의 민가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고종은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배재학당에서는 영어, 한문, 수학, 과학, 역사, 지리, 체육, 음악 등을 가르쳤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부할 수 있었다. 한국 교육의 새로운 역사로 평가받고 있다.

 

이 건물(동관)1916년 준공하여 배재 중고등학교가 1984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현재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외장 및 치장 쌓기 벽돌구조가 뛰어나고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부재들이 건립 당시의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배재학당 교정에는 이 동관을 비롯하여 1887년에 준공하여 1932년에 철거된 본관, 1923년에 준공한 서관, 1933년에 준공한 대강당, 광복 이후에 세워진 현대식 교사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관은 고덕동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배제공원을 만들 때 철거되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앞에는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 선교사 동상이 우뚝 섰다. 이 동상은 헨리 G.아펜젤러(1858.2.6~1902.6.11.) 선교사 탄생 1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정동 제일교회

 

정동 제일교회는 서울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 네거리에 있다. 이 교회는 당시 배재학당의 교장이었던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의 한옥 사택에 예배실을 만들면서 4명의 신자와 함께 정동제일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점차 교인들이 몰리며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짓기로 하여 지금 남아 있는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되었다. 

특히, 19세기 전원풍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 건물은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모델이 되었으며, 1977년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주시경 선생 등 한국 개화기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예배를 보며 미래를 준비했다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3.1운동 당시에는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일제강점기 항일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열렸으며, 1920년 이화여고생이었던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사 터 

그런데 이번에 정동 일대 근대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독립신문사 터가 두 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어느 것이 진짜 맞는 것인지 좀 헷갈렸다.

 

표지석 하나는 옛 배재학당 터였던 배재복합 빌딩 뒤편 아펜젤러 기념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종 33(1896) 우리나라 첫 민간 신문사를 세우다라고 쓰여 있다.

 

또 표지석 하나는 정동 네거리에서 서울시립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다. 여기에는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한글판과 영어판 두 가지로 발간하였다. 189647일 창간할 때부터 1899124일 폐간될 때까지 사옥이 이곳 독일영사관 터 안에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독립신문사 터표지석이 이렇게 두 곳에 있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 신문으로, 한국 근대 언론은 물론 독립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독립신문사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조속히 보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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