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규장각 정조의 혁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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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규장각 정조의 혁신 정치

by yeonjaei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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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규장각 정조의 혁신 정치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얼마 전 역사탐방의 일환으로 창덕궁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는데, 오늘은 창덕궁의 궐내각사 규장각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선왕조의 중앙 관청은 궁궐 안에 설치된 궐내각사와 의정부, 육조 등과 같이 궁궐 밖애 설치된 궐외각사로 크게 구분되었다.

 

궁궐 안에 있는 궐내각사에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 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1776(정조 즉위년) 3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것으로, 고종 때 이곳으로 옮겨지게 된다.

 

규장각은 정조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세조 때 양성지라는 사람의 건의로 처음 등장하지만 폐지된 사실이 있고, 숙종 때 다시 시도된 적은 있으나, 정조 때 이르러 제대로 된 직제 아래 놓여지게 되었다.

 

 

규장각은 세종 때 집현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초기에 세워진 목적은 집현전과 달리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등을 관리 보관하던 왕립도서관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정조 때는 규장각이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되면서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정조의 최고의 핵심 인물들은 거의 규장각을 거쳐 갔으며, 신분, 당파 상관없이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개혁 군주로 자신 정조를 뒷받침하게 한다.

 

, 규장각은 단순히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정치의 중추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하였다.”고 설각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정조의 개혁정치 중에는 문예부흥, 서얼의 인재 등용과 농업 중심이였던 조선에 농공상 균형적 발달로 더 풍요로운 조선을 만드는 등의 정책을 펼친다. 그래서 실학자들이 이 시기부터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이전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책들은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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