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흥선대원군 척화비의 숨은 비밀, 쇄국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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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일상

조선후기 흥선대원군 척화비의 숨은 비밀, 쇄국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by yeonjaei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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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흥선대원군 척화비의 숨은 비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오늘은 흥선대원군 척화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 그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서울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 · 함양군 · 경주 · 부산진 등을 포함하여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운 비석입니다.

 

 

척화비는 고종 8년 1871년에 세운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깎은 돌의 모서리를 자른 간단한 형태인데요. 비석의 크기는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너비는 대체로 40∼45㎝이고, 두께는 대체로 25㎝ 정도입니다.

 

 

 

척화비를 세운 배경으로는, 1863년 조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정권을 장악했는데요. 그가 집권할 당시 국제 정세는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미국,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에 몰려와 통상을 요구했으며, 때에 따라 무력 도발 및 시위를 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이런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1866년 병인양요의 발생과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통상수교거부’로 정책 기조를 급선회하게 됩니다.

 

 

급기야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조선왕조 질서 유지를 위하여 외국과 수교와 통상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세웠고, 이를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음력 4월에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던 것입니다.

 

 

 

척화비 앞면에는 주문으로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고 큰글자로 12자가 적혀 있는데요. 이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옆면에는 그 옆면에는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즉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고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그 중 서울에 세웠던 것은 1882년 9월 26일에 종로 보신각 부근에 파묻었는데요. 이것이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어 경복궁 근정전 서쪽 화랑에 진열되었습니다.

 

현재는 전국 각지 30여 개 곳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급변하던 구한말 당시의 상황과 쇄국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흥선대원군 척화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자료/이미지 출처> 이뮤지엄과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척화비, 고종, 흥선대원군'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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