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18대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숭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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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18대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숭릉’

by yeonjaei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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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18대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숭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얼마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오늘은 그중에서 18대 조선 현종과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9개의 능에 17()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1. 숭릉崇陵(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쌍릉

◎ 능의 조성 : 1674(숙종 즉위), 1684(숙종 10)

 

 

2. 능의 구성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3. 능의 역사

 

1674(현종 15)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숭릉을 조성할 때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능을 공사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숭릉 조성 후 9년이 지난 1683(숙종 9)에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 그 다음 해 숭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4. 현종(顯宗) 이야기

 

현종(재세 : 1641~ 1674, 재위 : 1659~ 1674)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인조 19)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인조 23)에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되었고, 1648(인조 26)에 왕세손이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에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1647(현종 15)에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5. 명성왕후(明聖王后) 이야기

 

명성왕후 김씨(재세 : 1642~ 1683)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효종 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현종 사이에 1(숙종) 3(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683(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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