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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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by yeonjaei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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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오늘은 그중에서 영조와 영조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개의 능에 17()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총 면적이 1915,890제곱미터나 된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1. 원릉(영조와 영조의 비 정순왕후의 능)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쌍릉

   ● 능의 조성 : 1776(정조 즉위), 1805(순조 5)

 

 

 

2. 능의 구성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이 건립되었다. 1비는 1776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2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3비는 1805(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3. 능의 역사

 

이곳은 원래 효종의 구 영릉(寧陵)자리였다. 영릉을 조성한 이후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 지속적으로 수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간 봉심(왕명을 받들어 능침을 보살피는 일)을 소홀히 한 관리들을 벌하기도 하였다.

 

1673(현종 14) 천릉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재궁과 외재궁에는 흠이 없었다. 이후 1776(영조 52)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인 구 영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1757(영조 33)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하였지만, 손자인 정조가 현재의 자리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고 원릉이라 하였다. 그 후 정순왕후 김씨가 1805(순조 5)에 세상을 떠나자, 원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4. 영조 이야기

 

영조(재세 : 1694~ 1776, 재위 : 1724~ 1776)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숙종 20)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숙종 25)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등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3년의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1776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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