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조선왕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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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조선왕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 ‘목릉’

by yeonjaei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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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조선왕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 ‘목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오늘은 조선왕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인 목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구리 동구릉은?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즉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개 능의 20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개의 능에 17()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917()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총 면적이 1915,890제곱미터나 된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2. 목릉穆陵(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

 

. 목릉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동원이강릉

  . 능의 조성 : 1600(선조 33), 1630(인조 8), 1632(인조 10)

 

 

. 목릉의 구성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인조 8)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移建)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

 

이 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건이 번거롭다하여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 목릉의 역사

 

목릉은 처음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인 1600(선조 33)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조성되었다.

 

이 후 선조가 1608년에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현 헌종의 경릉)에 목릉이라는 능호로 조성하였다가 1630(인조 8)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하였다.

 

1632(인조 10)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처음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를 정하였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의논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 1608, 재위 : 1567~ 1608)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명종의 양자 입적)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즉위 초에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608(선조 41)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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