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조선왕릉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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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조선왕릉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현릉’

by yeonjaei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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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조선왕릉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현릉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오늘은 조선왕릉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구리 동구릉은?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즉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개 능의 20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개의 능에 17()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917()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총 면적이 1915,890제곱미터나 된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2. 현릉顯陵(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 현릉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동원이강릉

. 능의 조성 : 1452(단종 즉위), 1512(중종 7)

 

. 현릉의 구성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 현릉의 능제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개로 줄었다.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 현릉의 역사

 

1452(문종 2)에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지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건원릉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처음 문종은 세종의 구 영릉(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정하였다.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11년 전에 왕세자빈 신분으로 1441(세종 23)에 먼저 세상을 떠나, 안산의 소릉(昭陵)에 모셔졌었다.

 

이후 현덕왕후는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 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가, 1512(중종 7)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중종 8)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천장하였다.

 

이 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문종 이야기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414(태종 14)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1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세종재위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대리청정기간에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말이 적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에 능통하였으며,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1450년에 조선 최초로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세종을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내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되었고,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다. 그러나 1452(문종 2)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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