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로 한글 가온 길 도보여행④ - 한글학회와 한글 이야기 10마당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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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로 한글 가온 길 도보여행④ - 한글학회와 한글 이야기 10마당 벽화

by yeonjaei 2020.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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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로 한글 가온 길 도보여행④ - 한글학회와 한글 이야기 10마당 벽화

 

 

얼마 전 서울 종로 문화유산 답사의 일환으로, 세종대로 한글 가온길 도보여행을 하였습니다. 한글 가온 길 도보 여행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로 세종대왕 동상, 세종로 공원, 세종 예술의 정원, 소파 방정환 선생 나신 곳, 한글 가온 길 새김 돌 등은 지난번 세 번에 걸쳐 소개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한글 가온 길 도보 여행 네 번째 이야기로, 한글회관 주변을 중심으로 한글학회와 한글 이야기 10마당 벽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세종대로 한글 가온 길은 우리의 고유 문자인 한글이야기가 가득한 한글 중심 거리로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한글을 지켜온 한글학회와 주시경 선생의 집터 등 뜻깊고 재미있는 한글 이야기가 가득한 코스입니다.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있다.

 

한글학회는 평범한 학술단체가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지켜 온 겨레의 학회라 할 수 있다. 우리 말과 글을 금지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학자들은 우리말을 지키려 한국어 사전 편찬에 몰두했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 큰사전을 완성하였다.

 

한글학회는 우리 말과 글의 연구, 통일, 발전을 목적으로, 1908831일 주시경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 1921123조선어연구회’, 1931110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925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2008년 창립 100돌을 맞았고 지금까지 한글날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도 만드는 등 지금까지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위 사진은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 있는 미륵전이다. 흰색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이곳은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총회가 열린 유서 깊은 곳이다. 미륵전 앞에는 한글학회 창립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한글학회 입구에는 한힌샘 주시경 스승 흉상이 있다.

한힌샘 주시경 스승은 18761222일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태어나 배달겨레의 말과 글을 한평생 갈닦으시다가 1914727일 서울 내수동에서 돌아가셨다.

 

한글 이야기 10마당 벽화

 

한글학회 길 건너 맞은 편에는 한글 이야기 10마당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에 적혀 있는 한글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도 있고, 또 잘 몰랐던 한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글로 적어 보았습니다.

 

1. 한글 창제는 백성을 위함이니라!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려 하자 집현전 학자 최만리는 여섯 개의 이유를 적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글자란 것이 간단한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 년 이어져 온 백성의 말이고 글인데 그걸 바꾸려면 써보고 여러 시험도 해 봐야 하거늘 고작 하급 관리 몇 명을 데려다 입을 열어 말하게 하고 그걸 반포하려 한다면......”

 

 

  그러자 세종이 최만리를 불러 직접 심문한다.

어려운 한자 대신 내 나라 백성이 읽고 쓰기에 쉬운 글을 만들려는 것인데, 너 최만리는 내가 몇 년 만에 얼렁뚱땅 글을 만들려는 걸로 보이느냐......”

 

2. 한글로 권력층을 풍자하다

 

 

세종대왕 시절 24년 동안 재상을 지낸 황희는 너그럽고 나라의 여론을 잘 살피는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같은 재상이었던 하 연은 까다롭고 나이가 많아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익명으로 담벼락에 이를 풍자하는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었다.

하 정승아, 망령되지 말라!”

 

 

 

백성들은 한자보다 읽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이 등장하여 정치와 세상일을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었다.

 

3.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중종 때 전문 통역인 주양우가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 일이 문제가 된다. 한글이 창제된 뒤 100년이 지났지만, 사대부들은 한글을 외면하고, 중국과 주변국은 한글을 알려는 호기심이 커지던 때이다. 언론 담당 기관인 사간원은 주양우를 고발한다.

 

 

우리나라의 일은 작은 것이라도 다른 나라에 전하면 안 되는 것인데, 주양우는 우리의 한글을 중국 사람에게 전하여 가르쳤으니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주양우를 심문하여 징계하소서.”

결국 주양우는 심문을 받게 되지만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 선구자라 할 만하다.

 

4.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가 생겨나다

 

18~19세기에 소설이 많이 보급되면서 돈을 받고 거리나 가정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에 얽힌 크고 작은 소문이 떠돌았다.

 

그 중엔 종로 거리에서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고 청중이 실제인 것으로 착각하고 전기수를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야기 주인공인 뜻을 이루지 못한 장면을 전기수가 실감 나게 읽어주자 청중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전기수를 악당으로 착각하고 눈을 부릅뜨고 낫을 들어 주인공을 대신해 죽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기수의 생생한 입담은 대중들이 한글 소설을 읽게 만드는 데 기여를 했다.

 

5.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고 서재필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며,‘아리랑을 악보로 만들어 보급하는 등 한글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고종의 밀사로도 활약했으며,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헐버트의 묘비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6. 189647일을 기념하라

 

개화기에 대다수 신문은 한자로만 기사를 써서 민중들은 세상일을 알기 어려웠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 순수 한글 신문으로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을 계몽하고 나라 안팎의 일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47일에 창간했고, 자주독립, 애국심, 국가발전, 교육, 생활 합리화, 민주주의, 남녀평등, 계급 타파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매년 4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7. 국어학자들의 얼로 살려낸 조선말 큰 사전원고

 

1908831일에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우리 말과 글의 연구 발전을 목적으로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그 뜻을 같이하는 김정진 등 유지들과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함께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도 한글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보존하기 위해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들었다. “조선말 큰 사전원고는 1942조선어학회사건재판의 증거물로 압수당하였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19459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된다. 원고지 255백여 장 분량, 16만 단어, 13년 동안 손으로 쓴 17권의 원고는 피와 혼이 담긴 국어학자들의 유산이다.

 

8. 한글, 임진왜란에서 암호로 활약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가 잘 모르는 한글이 암호처럼 쓰이면서 민중들이 한글을 많이 쓰는 계기가 된다. 군사작전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이 왜군을 피해 왕자를 피신시키려 할 때도 한글이 암호로 쓰였다.

 

 

강원도 중부에 있는 안변에서 비밀문서가 왔는데, 금은과 호피 등의 물건을 왜군의 통역인을 통해 보내준다면 왕자의 탈출을 기도할 수 있다고 하니 비변사에게 알려라.”

전쟁 중에 한글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왕실과 사대부들도 한글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9. 웃음보따리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은 근대 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 민족정신을 높이기 위해 계몽 운동, 국어 운동, 국어 연구를 했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느라 여러 교재를 보따리에 넣고 다녀서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어느 날, 한창 지리 수업을 하다 학생들이 졸자 주시경 선생은 교실 전체를 웃음바다로 만들어 졸음을 깨웠다. "여기는 고비 사막이외다. 날씨는 더운데다 길이 멀기도 멉니다. 상인들이 낙태를 몰고 지나 가는 중이외다.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상인들은 그만 주저앉아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의 지명을 울가(Urga)'라고 했지요.

주시경 선생은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언어학자였다. 한국어와 한글의 표준화와 보급 운동을 민족 자주의 차원에서 전개한 불멸의 선각자이다.

 

10.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자 한글의 세계화

유네스코(UNESCO)1989년에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문맹 퇴치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을 세종④대왕 상이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1997년에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은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국어는 2007년부터 유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의 국제 특허협력조약(PCT) 국제 공개어가 되었고, 영국 역사학자 존 맨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알파벳, 한글 "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글은 세계적으로 독창성과 과학성을 인정받은 문자로 서 예술과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어 한글 춤, 한글 패션쇼, 한글 캐릭터 등이 개발되고 있으며, 이러한 콘텐츠들은 한글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다음에는 세종대로 한글 가온 길 도보여행 다섯 번째 이야기로, 주시경 마당과 주시경 선생 집터, 한글 글자마당 등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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