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근대 역사길 탐방 *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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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근대 역사길 탐방 *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

by yeonjaei 202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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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근대 역사길 탐방 *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얼마 전 역사탐방의 일환으로, 서울 중구 덕수궁을 출발하여 정동 근대 역사길을 걸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오늘은 먼저 그중에서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덕수궁은 원래 명칭은 경운궁이었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그곳에 살면서 명칭이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사적 제124호이다.

 

덕수궁은 조선 역사에서 파란만장했던 시기의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61500의 면적에 대한문, 중화문, 광명문과 중화전, 준명당, 석어당, 석조전, 함녕전, 즉조당 등의 전각이 남아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한성으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었다.

 

그러자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정릉동행궁으로 삼아 임시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그 후 1611년에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1907년부터는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은 인조반정으로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이 덕수궁의 즉조당에서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고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폐위됐던 인목대비는 존호를 회복하고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의해 덕수궁 석어당 계단 아래 꿇어앉는 굴욕을 당한 끝에 결국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만다. 인조가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후 덕수궁은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대한문에는 문이 3개가 있는데, 이는 신분에 따라 출입을 달리 하기 위해서이다. 가운데 있는 큰 문은 어문이라고 하여 임금이 드나들었고 양쪽의 문은 문반과 무반 등의 신하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었다.

 

지금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지만 원래 대한문은 동문이었고, 인화문이 덕수궁의 정문이었다. 대한문이 정문이 된 것은 1900년경이다. 당시 도시 개조사업으로 인해 도로가 개통되고 서울의 중심이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연결되면서 대한문이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한문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바뀐 것으로 그전에는 대안문으로 불렸다. 그런데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일어났고, 1906년에 불타버린 건물들을 수리 하면서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이름을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가진 대한문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은 덕수궁 대한문 좌측 돌담길을 끼고 난 길에서 시작하여 덕수궁과 미국 대사관저 사이 골목길로 이어져 새문안로2길까지의 길을 말한다.

 

기존의 도로를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 재정비하고,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 도로와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길이는 900m이다.

 

르네상스식 근대 건축물과 데이트하기 좋은 공간이 많아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에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 등이 있어 문화 산책 코스로도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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