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 - 서대문 독립공원 서울 영은문 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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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 - 서대문 독립공원 서울 영은문 주초

by yeonjaei 2020.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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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서대문 독립공원 서울 영은문 주초

 

 

 

어제는 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서울 영은문 주초를 둘러보았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가면 서대문 독립공원이다. 서대문 독립공원은 조국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서대문 독립공원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여러 시설물이 있는데, 독립문 쪽을 바라보면 그 바로 앞에 서 있는 돌기둥과 같은 2개의 기둥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이지 할 정도로 기둥만 2개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서울 영은문 주초이며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1963.1.21.)

 

영은문 주초는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 정문에 세웠던 영은문 기둥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이다. 1896년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자주독립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 철거와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고 국민의 지지와 국왕인 고종의 동의를 얻었다.

 

 

때를 같이하여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부르고, 영은문을 헐어낸 후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영은문은 없어졌으나 그 기둥을 받치고 있던 주초만 제거하지 않고 그 앞에 세워 두었다. 그래서 영은문 기둥을 받치고 있던 주초만 2개 남게 된 것이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1430)에 모화관이라 개칭하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1(1536)에는 김안로 등 3정승의 건의로 격이 낮은 홍살문을 헐고 청기와를 얹은 영조문을 세웠는데 이것이 영은문의 전신이다.

 

중종 34(1539)에는 중국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칙이나 상사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영은문이라 써서 걸도록 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으며, 현재 전하는 서울의 고지도에는 연주문’, ‘연은문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또 선조 39(1606)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탄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해당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의 정문 역할을 하였고 수백 년에 걸쳐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은혜를 베푼 상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사대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종실록에는 영은문은 두 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로,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철거되기 이전에 찍은 사진 자료에 따르면, 문은 두 개의 장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평방 위에는 6구의 다포작을 배열했다.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바른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양끝에 취두,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얹었다. 양 기둥 사이에는 낙양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는 풍혈이 새겨진 인방재가 있고, 중앙에 영은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출처:다음백과)

 

 

현재 남아 있는 주초(주춧돌)는 화강암으로, 네모난 지대석과 대석 그리고 네모난 높은 장초석으로 구분하여 깎았다. 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이 좌우로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민흘림을 가진 장초석이 4방의 모를 약간씩 죽여 8각같이 모각되어 있다. 주초 윗면에는 목조가구를 고정시켰던 홈이 패어 있다.

 

 

영은문 주초는 처음 독립문 공사 때 그 앞에 있었으나, 1934년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되었고, 1979년 다시 이 앞을 가로지르는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서울 영은문 주초를 둘러보았다. 조선 시대에 사대 외교의 상징이었던 서울 영은문 주초가 그 약간 뒤쪽에 높고 당당히 세워져 있는 독립문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이다.

 

영은문 주초를 철거하지 않고 세워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우리 애국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는 과거와 같은 굴욕적인 대외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스스로 생각해 본다.

영은문 주초는 서울 영은문 주초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011.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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