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따라 경기도 여주 여행 추천 - 북벌의 기상 효종 대왕 영릉(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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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따라 경기도 여주 여행 추천 - 북벌의 기상 효종 대왕 영릉(寧陵)

by yeonjaei 202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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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따라 경기도 여주 여행 추천-

 

 북벌의 기상 효종 대왕 영릉(寧陵)

 

 

 

어제는 남한강을 따라 경기도 여주 여행, 북벌의 기상 효종 대왕 영릉(寧陵)을 찾았다.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으며, 효종대왕과 그의 비 인선왕후의 능이다.

서울에서 경강선 전철을 타고 세종대왕역에서 하차하여 버스를 타고 효종 대왕 영릉에 도착했다.

 

 

효종 대왕은 인조와 인열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고 자는 정연이다. 1645년 효종 대왕의 형인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자 같은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49년 인조대왕이 돌아가시자 조선 제17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하멜 일행이 효종대왕을 알현하는 모습(하멜표류기 중에서) 

 

효종대왕은 재위 10년 동안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는데,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으며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효종 대왕은 북벌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효종은 병자호란 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8년간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조선 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을 수 없는 민족의 한으로 생각했다. 왕위에 오른 후 이 수치를 씻고자 대내적으로는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북벌을 계획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즈음 러시아가 시베리아 쪽으로 남진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효종은 우리 군대의 능력을 시험하고 청나라 군사 정세를 탐지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나선정벌 원정군을 보내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기도 하였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송시열 사당, 대로사

 

효종의 북벌의지는 송시열의 <기해독대>에서 잘 나타나는데, 효종은 정예화된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를 곧장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은 효종이 41세 때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곳이 효종 대왕 영릉 입구이다. 입구에서 이것저것 살펴보고 앞으로 들어갔다. 세종대왕 영릉은 공사 중으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5월 중순 이후에 일부 개방을 한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가 조금 올라가면 재실이 나온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해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이다. 조선 왕릉의 재실들이 일제강정기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재실에서 조금 올라가 홍살문이 보이고 홍살문 못미쳐서 좌측으로 세종대왕 영릉(英陵)으로 가는 왕의 숲길이 보인다. 지금은 세종대왕 영릉이 공사 중으로 막아놓아 갈 수가 없다.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대왕 영릉을 연결하는 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효종 대왕 영릉을 먼저 참배한 후 세종대왕 영릉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왕의 숲길 시작점에 세종대왕 영릉의 모습이 계절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을 보면서 위안으로 삼아본다. 이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1397~1450)과 소현왕후(1395~1446)의 능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 능이다.

 

세종대왕 영릉은 1469(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창 능임을 나타내었다.

 

 

다시 효종 대왕 영릉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살문과 향로, 어로가 보인다.

홍살문은 능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부터는 청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향로는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고, 어로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을 말한다. 영릉의 특징 중의 하나는 금천교가 통상 홍살문 앞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홍살문을 지나 있다.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수라간과 수복방이 보인다. 위의 것은 수라간, 아래 것은 수복방

수라간은 제사를 지낼 때 쓸 제사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등의 준비를 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제사 때 제관의 대기와 준비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정자각이다. 정자각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자 모양으로 지은 집을 말한다.

 

 

효종 대왕릉 비각이다

 

 

이제 효종 대왕 영릉이 보인다.

위의 능이 효종 대왕 능이고, 아래에 있는 능은 효종 대왕의 비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효종 대왕 능은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674년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에 조성하여 조선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다. 영릉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고 있다.

 

참고로 조선 왕릉은 총 42기이며, 북한에 소재한 2기를 제외한 40기는 20096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어제는 남한강을 따라 경기도 여주 여행, 북벌의 기상 효종 대왕 영릉(寧陵)을 둘러보았다.

둘러보고 난 느낌은 효종 대왕께서 추진하시던 북벌이 계획대로 잘 추진되었다면 현재의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는 왕세자들이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고 또 나라가 무슨 일을 강하게 추진하려면 나라가 먼저 강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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