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 - ‘천연정 터’ 와 ‘경기중군영 터’, ‘청수관 터’
본문 바로가기
여행축제방송연예

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 - ‘천연정 터’ 와 ‘경기중군영 터’, ‘청수관 터’

by yeonjaei 2020. 5. 7.
반응형

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 - ‘천연정 터경기중군영 터’,  ‘청수관 터

 

 

어제는 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앞에 있는 천연정 터경기중군영 터’, ‘청수관 터를 찾았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 통일로를 따라가다 보면 금화초등학교가 나온다. 이 학교 정문 좌우측에는 표지석이 있는데, 우측에는 천영정 터경기중군영 터’, 그리고 좌측에는청수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천연정은 도성 밖 서지 서쪽 가에 있던 정자로 18세기 중엽에 세워져 경기 감영 중영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서지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연못으로서 한성 서쪽에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서편 연못이라고도 하였고 못이 천연적으로 되었다는 뜻으로 천연지라고도 하였다. 이 연못은 태종 7(1407)에 만들어졌는데, 이 해에 중국사신을 맞기 위하여 지금의 영천시장 부근에 모화루를 세우고 그 남쪽에 서지를 파게 하였다.

 

천연정은 바로 이 서지 연못 서쪽 가에 있던 정자로 현 금화초등학교 바로 뒷편 동명여자중학교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조선 영조 17(1741)에 세워졌다. 그 밑에는 기우제단이 있었고 서지 서쪽 언덕에는 경기중군영이 있었다고 한다.

 

한성에는 서지 외에 동대문 밖에 동지, 남대문 밖에 남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서지가 제일 크고 넓었으며 연꽃이 무성하였다. 서지는 1929년에 메워지고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였던 죽첨진일랑의 이름을 딴 죽첨공립초등학교를 이곳으로 옮겼으며, 광복 후 금화산 기슭이 있음므로 금화국민학교, 금화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경기중군영은 조선후기 경기도 순영의 지휘관인 중군이 있었던 곳으로, 서대문구 천연동 동명여자중학교 일대는 경기중군영이 있었던 곳이다. 중군은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 서반 외관직이다. 각도 관찰사의 부장으로 정원은 각도 1명씩이고 도내의 군무는 중군의 손에서 처리되었으며, 중군이 직무를 보던 관아를 중군영이라 하였다.

 

천연정을 중심으로 한 경기중군영 구내에는 서상헌, 청원각 등 여러 건물이 즐비하여 넓은 서지 연못 위의 연잎, 연꽃과 함께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금화초등학교 정문 왼쪽 벽에는 청수관 터라고 쓰인 표지석이 보인다. 금화초등학교 뒤편 동명여자중학교 일대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치된 외국공관이었던 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개항 이전에는 서대문 밖 천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한 경기중군영이 있던 곳이었는데, 개항 후 고종 17(1880)에 경기중군영을 일본공사관으로 제공하면서 청수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일본공사관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도성 안에 외국공사관의 설립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1880(고종 17) 11월에는 하나 부사가 조선 초대 공사로 공식 부임하면서 이후 세계열강이 앞을 다투어 한성주재 공사관을 설치하는 구실이 되게 되었다. 청수관 개설이 기점이 되어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본래 일본인의 도성 안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1880년 서대문 밖 청수관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40여명의 일본인이 기거한 것이 시작이었다.

 

1882(고종 19)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 분노한 군인들과 가족 등 시민 수만 명이 청수관으로 노도처럼 밀어닥치자, 일본공사 하나 부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20여 명의 공사관원과 함께 인천으로 도주하여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당시 청수관(경기중군영)의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타고 그 후 방치되어 오다가 일제는 1910년 국권침탈 후 향상회관이라는 건물을 짓고 일본의 욕심을 미화하는 정책을 펼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에는 학교재단인 동명에서 인수하여 동명여자중학교가 세워졌다.

 

서울 서대문 문화유산 투어의 일환으로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앞에 있는 천연정 터경기중군영 터’, ‘청수관 터를 둘러보았다. 우리 역사상 그 소중한 흔적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표지석만 달랑 서 있는 것이 많이 안타까웠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이곳에 공사관 개설을 시작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이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되었는데, 우리는 왜 그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속수무책 당해야만 했는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신채호 선생님께서 과거를 잊은 민족은 절대 미래가 없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반응형

댓글